모두들 어린시절 고향의 모습은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걸까. 나의 고향도 그랬다. 70년대 중반이 넘도록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산간벽지.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이고 그 가운데를 흐르는 맑은 내에서 발가벗은채 물장구치던 그곳. 하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달리 척박한 산골의 살림살이는 여간 피폐했던 게 아니었다. 그래서 밤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술주정꾼이 있었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엉겨붙는 싸움꾼도 있었다. 공장에 돈벌러 갔다 폐병만 얻어온 딸도 있었다. 그것은 어떤 한 집안의 모습이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의 일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것은 모두 남의 일, 소설속의 한 장면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지금 나에게는 그저 철없이 즐겁기만 했던 어린시절의 내 모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책보를 허리에 매고 친구들과 함께 달렸던 들판이 남아있고 흙탕길을 기어다니며 미꾸라지를 잡던 고사리손이 있고 여름밤에는 술래잡기로, 겨울에는 삼년놀이로 우리를 반겨주던 학교 운동장이 있고 마당윷을 함께 하며 김치서리를 했던 친구 사촌 육촌들이 있다. 꼭 한번 다시 보고싶은 그리운 얼굴들이 고향과 함께 머리속에 떠오른다. 더구나 지금은 모두들 고향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명절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명절을 맞고도 그들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하는 기대조차 가질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여자일 뿐 아니라 나와 함께 했던 친구 육촌들 모두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내 고향에는 지금 연고도 없지만 나는 이제 명절이면 남편의 고향으로 가 그곳의 친척들과 만나야하기때문이다. 친구들 또한 어느 곳에선가 낯선 친척들과 낯선 인사를 나누며 낯선 고향을 익히겠지. 잊혀졌다가도 명절이면 고향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 철없이 아름답고 즐겁게만 보냈던 그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들. 이젠 정말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고향의 싸움꾼 이야기를 듣고 한밤중 남의 김장속에서 김치를 꺼내 찢어먹던 겨울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강경선·서울 강동구 고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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