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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그림.음악으로 다시보는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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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그림.음악으로 다시보는 헤세

입력
1999.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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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몰한 독일 학생들의 배낭에서 발견하는 책」. 자살로 삶을 마감한 독문학자 전혜린은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소설 한 권을 이렇게 소개한 적이 있다. 금세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가? 60년대 이런 평이 붙어 「데미안」이 소개된 뒤로 이 책은 독일 학생들의 배낭이 아니라 한국 중·고생들의 책가방에서 더 쉽게 발견되었다. 70년, 80년대까지 그랬다. 독일에서 수십만 리 떨어진 동양나라 한국땅에서 사춘기를 통과하는 청소년들은 「데미안」에서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떴다. 자신이 새처럼 「알을 깨고 나오는」 묘한 흥분과 무언가 인생의 지혜를 한자락 붙잡은 느낌에 감동했던 기억들.헤세는 소설 못지 않게 시와 산문을 잘 썼다. 뛰어난 재주까진 아니어도 다정다감한 수채화를 그렸고, 음악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헤세의 기행문집, 헤세의 문학과 음악에 대한 책이 최근에 잇따라 출간돼 교양인 헤세의 면모를 다시 한번 잘 드러내주고 있다. 7월에는 헤세도서관도 국내 대학에 탄생했다.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를 낳은 인도여행

1911년 9월 34세의 헤세는 독일을 떠나 짧은 인도여행을 했다. 이탈리아 여행은 두어 번 있었지만 동양으로 떠나는 것은 새로운 일이었다. 외조부가 동양학자라는 집안 내력도 어느 정도 작용했던 여행이다. 여정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헤세는 인도가 아니라 지금의 스리랑카인 실론섬과 싱가포르를 포함한 말레이반도 일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여행을 기록하고 돌아온 뒤 동양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생각해서 남긴 글이 「헤르만 헤세의 인도 여행」(푸른숲 발행, 이인웅·백인옥 옮김)에 담겨있다.

「고요하고 우아한 야자나무 숲에서, 어여쁜 말레이 마을 골목에서, 고상하게 단색으로 통일된 중국인 거리에서 서구의 문화적 무능력이나 설교하는 족보도 없는 영국식 고딕 교회를 바라본다는 것은 불결함과 고열 못지 않게 인도 여행에서 겪는 당혹스러움 중의 하나다」. 3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조국 독일을 비판하는 글을 실을 수 있었던 정신의 뿌리가 엿보인다. 그는 「나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인도인, 말레이인, 중국인, 일본인들한테서 배운 모든 인간은 하나라는 일체감과 연대감에 대한 확고한 감정」이라며 낯선 동양의 나라를 추억하고 있다.

헤세의 그림과 산문, 그리고 시

헤세는 시로 문학인생을 시작했고, 산문을 즐겨 썼다. 올해 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종문화사 발행)라는 헤세의 연애론이 출간된 데 이어 다음 달께 헤세 문학의 황금기였던 스위스 테신 시절의 산문과 시, 그리고 그림까지 모은 「테씬_테씬 시절의 시와 산문과 그림」(민음사 발행)이 숙명여대 정서웅 교수의 번역으로 나올 계획이다.

연애론에서 헤세는 소년시절은 열정적 사랑이었고 장년기는 욕정에 굶주렸으며, 만년에 이르러 만인과 자연에 바치는 사랑의 경지를 얻었다고 쓰고 있다. 구름같은 안개가 깃드는 발코니를 사랑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머물렀던 테신의 나날은 자연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즐기는 일의 연속이었다. 「모든 인간은 마음 속에 무언가를 지녔다. 무언가를 말할 것을 가졌다」. 그것을 「말로든, 색깔로든, 음조로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는 수채화를 그렸고, 포도밭을 가꿨고, 시를 지었다. 격정적인 성장소설의 면모를 벗어난 중장년 이후의 헤세의 내면을 잘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헤세 문학이 가진 음악의 요소

음악은 헤세 이해의 중요한 열쇠다. 독문학자 이신구 교수(전북대 독어교육과)는 『헤세의 언어는 음악이라고 할 정도로 헤세 문학은 형식이나 내용에서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헤세 문학은 악보 없는 음악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글쓰기를 연주로 이해한 그는 소나타 형식과 푸가 형식을 적용해 작품을 창작했다.

이교수의 책 「헤세와 음악」(태학사 발행)은 헤세의 문학을 음악 형식으로 분석한 국내 최초의 연구서다. 예컨대 「데미안」 「싯타르타」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소나타 형식, 헤세의 모든 사상이 집약된 「유리알 유희」는 푸가 형식으로 분석한다.

헤세의 음악 편력은 쇼팽에서 출발, 슈만을 거쳐 마지막으로 모차르트와 바흐에 귀의했다. 그에게 모차르트 음악은 계시의 음악이자 피안에서 울리는 음악, 바흐 특히 바흐의 칸타타는 불멸의 음악이다. 반면 베토벤 이후 낭만주의 음악, 특히 바그너의 음악은 도취적이고 데카당스적인 요소를 지닌 몰락의 음악이라며 싫어했다.

헤세도서관 개관

대전의 목원대 도서관에는 한국헤세학회(회장 홍순길·목원대 교수)가 운영하는 헤세도서관이 있다. 7월 2일 문을 열었다. 여기에는 헤세의 일기, 편지, 작품 번역서, 헤세에 관한 국내외 연구 등 1,300여종의 문헌과 헤세가 시를 낭송한 육성녹음, 헤세의 그림 등이 모여있다. 헤세 탄생 100주년(97년) 기념우표, 헤세 탄생을 알리는 당시 신문기사도 갖고 있다. 한국헤세학회는 내년 초 헤세의 친필원고, 초판본, 유품, 그림 등으로 서울에서 전시회를 할 예정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김범수기자

bskim@hk.co.kr

◇헤세가 들려주는 말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데미안

■우리는 덧없는 존재요, 변화 과정에 있는 존재요, 가능성이 있는 존재다. …우리들이 힘에서 행위로, 가능성에서 실현을 향해 나아갈 때, 진실한 존재에 참여하고, 완전한 것, 신성한 것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다./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아름다운 것이 영원히 변함없이 아름답다고 하면, 처음에는 그것을 보고 기뻐할른지 모르지만 점점 냉정한 눈으로 보게 될 것이고 그까짓 것 언제나 있는 것, 오늘 뿐이겠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마련일 걸세. 반대로 나약한 것, 변하는 것을 볼 때 기쁨을 느낄 뿐 아니라, 슬픔마저 느끼게 된단 말일세./크눌프

■인간은 그가 받아야 할 것을 유년시절에 13, 14세까지 충분히 그리고 예민하고 신선하게 체험한다. 그는 평생토록 그걸 삶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로스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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