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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파병과 '인권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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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파병과 '인권국가'

입력
1999.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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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분쟁이 종식되고 「문명충돌」이 시작되었다는 헌팅톤의 말대로 국지적 지역분쟁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란·이라크전쟁, 소말리아사태, 인도·파키스탄의 카슈미르분쟁, 팔레스타인 문제, 유고 내전, 그리고 동티모르에 이르기까지 90년대에 일어난 크고 작은 분쟁들은 모두 테러, 암살, 양민학살 등과 같은 잔혹한 행위를 동반했다.결과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처뿐인 소모전. 첨예한 충돌이 예상되는 지역은 세 군데이다. 아프리카 중서부, 발칸반도에서 구소련 동부에 이르는 지역, 그리고, 동남아시아. 이 지역들은 다인종, 다종교, 다언어권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종, 종교, 언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좌우하는 3대 요소인 만큼, 이것으로 촉발되는 충돌은 사생결단의 양상으로 치닫는다. 문제는 우리의 인접지역인 동남아시아가 아시아의 화약고라는 사실이 동티모르 사태로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동티모르는 과거에는 포르투갈령이었던 것을 75년 인도네시아가 강제합병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제국주의지배와 국경분쟁으로 촉발되었던 인도차이나반도의 50년 전쟁이 이제는 종주국으로부터의 분리와 독립을 외치는 소수종족의 분규로 형태가 바뀌었다. 말레이시아, 필리핀, 중국이 모두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아시아에는 유럽연합처럼 지역분쟁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통합적 정치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유고내전에서 보았듯이, 유럽은 무력을 동반한 지역분쟁에 발빠르게 대처하는 통제기구를 갖고 있다. 나토, 유럽연합, 유럽안보협력기구가 그것이다.

이에 비하여, 아시아는 「아시아 정체성」을 외치면서도 서로 개별국가로 존재할 뿐, 인접국가에서 자행되는 천인공노할 만행에 신속하게 개입할 국제기구가 없다. 단지, 유엔의 결정에 의존할 따름이다. 인종 및 종교분쟁이라는 「세계화 쟁점」의 해결은 전적으로 지역정부에 맡겨질 수 밖에 없다는 문명충돌의 딜레마가 동남아시아에서 첨예하게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패권국가인 미국에의 의존도가 이 지역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김대중대통령의 동티모르파병 결정은 이런 점에서 잘 한 일이다. 때맞춰 열렸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회의에서 역내국가의 협력적 해결방식으로 다국적군을 투입하자는 제안은 평화유지군 파견에 시간을 요하는 유엔안보리의 허점을 보완한 것으로 국제적인 호평을 받았다. 경제와 무역문제에만 신경써온 APEC이 역내 정치적 문제를 거론하여 합의한 것은 처음이어서 더욱 그 의미가 새롭다. 공포에 질리고 허기에 지친 수십만명의 양민들을 외면하고 경제적 쟁점에만 집착하는 APEC을 누가 신뢰하겠는가라는 김대중대통령의 인권중시론에 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이 사뭇 감동받았다는 후문이다. 동티모르와 같은 사태가 말레이시아, 필리핀, 중국 내부의 약소민족, 중국과 대만, 한국과 북한간에 발생할 개연성이 많기에 이번의 파병결정은 좋은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차제에 이 지역의 정치분쟁을 해결하는 아시아·태평양연합(APU)의 창설을 구상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김대통령이 파병의 명분으로 힘주어 강조한 대목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아시아의 인권국가로서 우리가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레토릭이 그것. 인권신장의 정치를 펴겠다는 의지를 누가 나무랄까마는, 통치자의 현실감각이 국민들과 너무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셈이 되었다.

국제인권기구인 엠네스티는 한국을 여전히 요주의 관찰대상으로 정하고 인권탄압의 사례를 수시로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투옥된 파업노동자, 고문경찰, 국가보안법 등이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부당해고와 여성차별의 사례가 늘고 있다. 아시아의 인권국가라는 레토릭은 손님대접용으로 그치기를 바란다./송호근 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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