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내게 친구처럼 도란도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소설가 구효서(42)씨가 중·단편을 모은 창작집 「도라지꽃 누님」(세계사 발행)을 냈다. 창작집 4권, 장편소설 10권. 나이로야 그러기 힘들지만 작품 분량으로 보면 중견으로 쳐야 할 구씨가 이번 소설집을 내고 좀 다정스러워진 듯도 했다.그에게 한국일보 문학상을 안겨준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을 표제작으로 삼은 창작집을 내고 만 4년. 그 사이에 장편소설은 여러 권 냈지만 소설가의 재주를 뽐내기에 가장 적당하다는 단편을 모아 소설집을 낸 것은 오랜만이다.
단편과 단편 사이 그는 30대에서 40대로 건너왔다. 『30대까지는 힘들게 썼고 40이 넘으면서부터는 좀 편하게 썼다』 몇 년 사이 그의 글쓰기가 바뀐 듯한 감을 잡는다.
소설가 구씨는 실험성이 강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창작 활동 초기부터 이름 나 있었다. 거대권력의 실체라는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독특한 상황설정으로 풀어간 「아이 엠 어 소피스트」에서 시작해 그의 소설은 대개 역사와 사회문제를 창의성과 돌파력을 갖고 안정된 문체 속에 끌고 나간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창작집에 담긴 11편의 중·단편들에선 색다른 면모가 느껴진다. 그의 소설은 조금 나직하게 깔리는 잔잔한 목소리로 변했고, 너무도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선운사 사하촌의 창녀였다가 식당을 겸한 여관의 주인이 되어 있는, 빨갱이로 몰려 자신을 살려놓고 숨진 아버지를 그리며 감나무씨를 심으면 자란다는 고욤나무에 집착하는 한 남자를 만나 동거 부부로 지내는 여자의 목소리(「나무 남자의 아내」). 그의 소설은 그런 목소리를 닮아가고 있다.
「주인집 아주머니와 간장도 담그고 텃밭에 시금치 씨앗을 뿌리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멀리서 저를 찾아온 손님이 있으면 그와 맥주를 마시기도 했고 새벽에 그와 함께 은행나무 밑을 산책하면서 녹즙기며 안개 같은 것에 대해 말하기도 했지요. 보름에 한 차례씩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러 절에 올라가고…. 그렇게 살았고, 특별히 쓸쓸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삶이란 순간순간을 사는 것일 뿐 무언가를 대비하며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지요」 때마침 가을은 오고 있었고, 그 여자는 참으로 쓸쓸했지만 가없는 포용력으로 상처받은 한 남자의 영혼을 다독이며, 동백꽃이 피었다지는대로 낙엽이 떨어지고 쌓이는대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꿰어서 말하자면 이번 창작집에 담긴 구씨의 소설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간단치 않은 사연이나 한 사람의 맹렬한 집착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반신불수의 아내를 위해 10년 동안 생리대를 사는 벙어리(「포천에는 시지프스가 산다」),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죽음에 이르는 꽃다발을 손에 쥔 남자(「나그네의 꽃다발」). 그들은 고달픈 사랑에 목을 매었고, 결국 그것들을 가지지 못하고 마는 존재들이다.
『삶에는 일정한 주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생활 그 자체,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풍기는 냄새, 생각이며 몸짓의 아우라 그런 것이 있는 것 아닌가』 구씨는 『예전처럼 특별한 메시지를 담으려 하기보다 삶의 메시지 같은 걸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모습을 그렸다』고 말했다. 남과 여, 수수께끼 같은 사랑. 끊임없는 욕망과 그 실패의 장면에서 얻어지는 것들. 더는 말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어떻게 말할 수도 없는 삶. 이런 이야기들을 잔잔하게 들려주면서 소설가 구효서는 솜씨 좋게 자신의 소설 인생에 새로운 경지를 펼쳐보이고 있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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