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의의를 밝히는 학술회의가 21일 오전10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한국광복군동지회가 「한국광복군의 창군과 역할」을 주제로 개최하는 이번 행사는 광복군 창군59주년(17일)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서울대 신용하(愼鏞廈·사회학) 교수는 주제 발표를 통해 한국광복군의 성격과 의미를 짚어본다. 신교수는 무엇보다 광복군의 자주성을 강조한다. 미주, 하와이 동포의 애국 헌금 4만원으로 창군됐고, 중국 땅에서 중국의 지원없이 창군됐다는 점 등에서 자주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구한국군과 의병을 계승한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조소앙(趙素昻) 임시정부 외교부장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보고」에서 『1907년 8월1일 적인(敵人)이 우리 국군을 해산하던 날이 곧 우리 광복군 창설의 때』라고 밝혔다. 창군 당시 총사령관에 이청천(李靑天) 서로군정서 독립군 사령관을,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 북로군정서 독립군 연성대장을, 그밖에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간부 출신 장교들을 주요 지휘자로 배치한 것은 한국광복군이 만주 등지의 독립군을 계승한 사실을 증명한다고 신교수는 말한다.
광북군은 결사대 성격이 강하다는 점도 강조한다. 신교수는 『광복군은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치기위해 지원한 청년들로 구성돼 일반 정규군보다 애국심과 전투력이 훨씬 강했다』고 주장한다.
단국대 한시준(韓時俊·사학과)교수는 광복군의 활동을 소개한다. 주요 활동의 하나가 일본군 점령지역에 잠입, 그곳의 한인 청년을 포섭하는 초모활동(招募活動). 초모활동은 대원들의 적지않은 희생을 가져왔지만 처음에 총사령부만 구성한 채 출발했던 광복군이 3개 지대를 근간으로 하는 군사조직으로 발전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한교수는 밝힌다.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작전도 폈다. 인도 버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 영국군과 대일전쟁을 전개한 것도 그 중 하나. 한교수는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와의 공동작전도 소개한다. 「독수리작전」으로 명명된 이 작전은 광복군 대원이 OSS 훈련을 받은 뒤 한반도에 침투, 첩보활동과 게릴라 활동을 하도록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45년 4월3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대원들은 미국 잠수함을 타고 국내에 침투, 거점을 마련한 뒤 공작과 민심 선동 등의 작전을 펴고 OSS측과 연락해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 무장활동을 전개하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8월10일 일제의 포츠담선언 수락과 곧이은 항복으로 이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박광희 기자
■학술회의_ 남북이산가족문제 해결방안 / 21일 오후2시 대한적십자사 대강당 / 통일연구원 (02)901-2563
■공청회_ 에너지절약 강화 / 21일 오후2시 대한상의 중회의실 / 에너지관리공단 (0342)7106-274∼6
■토론회_ 21세기 대(對)개도국 기술협력의 과제와 대응방안 / 21일 오후3시 국제협력연수센터 / 한국국제협력단 (02)740-5122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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