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허(黃河)가 없는 중국을 상상할 수 있을까. 중국 문명의 모태이자 중심지였던 황허는 매년 16억톤의 황토를 하류로 운반, 국토를 바꾸고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중국인의 생활양식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우리가 처음 간 곳은 산둥(山東)성의 소재지인 지난(濟南)을 끼고 흐르는 황허의 하류였다. 여름의 뜨거운 햇빛 아래 강은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강변은 오랜 세월동안 퇴적된 황토가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었는데, 점토처럼 물렁물렁했다. 강은 텅빈 듯 적요했다. 벌거벗은 세 아이가 물놀이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웃음소리도 강의 적요를 깨뜨리지 못했다.
나는 황허의 적요 속에서 이방인 지리학자 조지 B. 크레시의 말을 생각했다. 그는 중국에 대해 『그토록 많은 인간이, 그만큼 자연과 더불어 가깝게 산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일천세대에 걸쳐 중국인은 대지 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는데, 그들의 의해 변모되지 않는 땅은 거의 한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탄식하듯 말했다. 그의 탄식은 거대한 대륙의 유장한 역사에 대한 경이이기도 했다.
황허의 변천사를 들여다보면 크레시의 탄식과 경이를 실감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인 청해성 북쪽기슭의 분지에서 발원하여 8개성 1개 자치구를 지나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황허는 중국인에게 삶의 원천이자 재앙의 원천이었다. 퇴적물로 인해 하상이 높아진 「누런 강」은 수시로 제방을 허물고 인간의 마을을 덮쳤다. 그 재앙은 황허를 「중국의 슬픔」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치명적 재앙에 대항하는 중국인의 피어린 역사(役事)는 황허의 물길을 곳곳에서 바꾸어놓음으로써 땅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 변화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다.
항조우(杭州)에서 베이징(北京)까지 장장 1900여㎞ 구간을 관통하는 경항대운하는 남북간의 교통을 담당한 수운의 대동맥이다. 7세기 초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군량보급로로 처음 건설한 이후 1677년(청나라 강희 27년)에 완성되었다.
1,000여년에 걸친 그 엄청난 대역사의 한 부분을 우리는 산둥성 서남부에 위치한 지녕(濟寧)에서 확인했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 방랑할 때 술을 마셨던 곳인 태백루를 품고 있는 이 도시는 대운하 연안의 유명한 항구로서 산둥성 서남부의 물류집산지로 이름 높았다.
넓은 들판 중앙을 흐르는 운하 위에는 길쭉한 배들이 한가롭게 떠 있었다. 운하의 폭은 지난에서 보았던 황허보다 훨씬 좁았다. 나는 웅크리고 앉아 강물 속에 손을 넣었다. 더운 날씨 탓인지 물은 미지근했다. 이 미지근한 물이 겨울이 되어 얼어붙으면 물자 운반을 위한 좋은 도로가 되었다. 특히 배에 싣기 힘든 큰 석재들을 집중적으로 운반했다. 그 석재들은 대부분 권력을 치장하는데 쓰였다. 치적비와 무덤과 황금색 지붕을 떠받치는 기둥으로써.
고개를 드니 흰 나비 한 마리가 보였다. 손도 발도 없는 그 작고 가벼운 존재는 1,000여년의 세월이 고인 운하 위를 춤추듯 날고 있었다. 장자(莊子)는 자신이 나비가 되어 날아 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나비는 자신이 장자임을 알지 못했다. 꿈에서 깨어난 장자 역시 자신이 나비 꿈을 꾼 장자인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너무나 투명하여 부서지기 쉬운 장자의 환상은 그러나, 역사의 시간 위에서 역사를 내려다보며 수천년동안 생기발랄하게 날아다녔다. 황하의 물결 위에서 너울거리는 저 나비처럼./정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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