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장기집권 노린 '친위 쿠데타'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는 …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라는 특별선언문을발표하고, 그 후속조치로 비상계엄령의 선포와 함께 모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또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 국무회의를 신설하여 국회권한을 대행케하는 초헌법적 조치를 단행했다.
이어 11월 21일 야당의 반대운동이 일체 금지되고 정부의 일방적인 계몽 활동 속에서 치루어진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1인에게 입법, 사법, 행정부의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이른바 「영도자적 대통령제」를 구축하기 위한 유신헌법이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이로써 한국정치는 민주 헌정의 중단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고, 87년 6월까지 독재체제의 길고 어두운 터널로 빠져들게 되었다.
■정치적 충격이 연속된 70년대 초반
70년대 초반은 충격적인 정치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69년 9월의 변칙적인 3선 개헌안 국회통과가 그러한 충격파의 시발이었다면, 72년 10월의 이른바 「10월 유신」은 그 종착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70년 연초에 야당인 신민당의 「40대 기수론」이 들려오더니, 2월에는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를 표방하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 나왔다.
적대국가인 중공(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표방하며 주한미군 감축을 선언한 「닉슨 독트린」은 한국의 집권 세력이나 일반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안보 위기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9월에는 40대의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전당대회에서 지명되더니, 11월에는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였던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구조에 기반한 성장일변도 정책이 밑으로부터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 1개월전인 71년 3월에 미국은 주한미군 6만명 중1개 사단(약2만명)을 철수시켰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여건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 대통령은 김대중 후보에게 불과 95만여표차로 신승하는 데 그쳤다.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이 선거에서 두 후보는 안보정책과 경제정책 등에서 첨예한 정책대결을 펼쳤다.
김대중은 『이번선거에서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박정희는 종신 대통령을 위해 총통제를 추구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고, 박 대통령은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나서지 않겠으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대응했다.
■체제전환을 위한 정치적 수순들
71년의 대통령선거는 정치적 불안정의 종착점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유신독재체제를 향한 새로운 출발점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은 71년 5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중단없는 조국근대화」와 「혼란없는 안정」을 강조했으나, 「총통제 음모분쇄」를 내세운 야당에게 사실상 패배했다.
신민당은 이 선거에서 44.4%의 득표율로 이전의 의석 44석 보다 2배가 넘는 89석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는 박 대통령과 공화당의 국내정치적 지지기반이 무너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돌파하려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불과 7개월여만인 12월 6일 박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위협」과 「국제정세의 변화」를 명분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72년에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유신체제로의 개헌을 위한 명분을 만들어 냈다. 8월에는 무원칙한 외자도입과 부실차관기업으로 초래된 경제위기를 막기 위해 사채시장을 동결하는 초헌법적인 「8·3조치」를 단행했다.
박 대통령은 핵심 측근들을 중심으로 이미 72년 5월부터 「풍년 사업」이란 암호명아래 유신 헌법 작성작업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71년 양대선거를 전후하여 동아일보의 언론자유수호운동, 무려 80여명의 소장판사들이 사표를 제출하며 촉발시킨 사법권수호운동 등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반독재투쟁이 전개됐으나 독재체제를 향한 박 대통령의 행보를 멈출 수 없었다.
■장기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
헌정중단과 초헌법적인 조치들을 통한 유신체제의 성립은 닉슨독트린에 따른 「급격한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적응, 7·4 남북공동성명에 기초한 새로운 남북관계의 정립,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실제는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였다.
확실히 주한미군의 철수, 7·4 남북공동성명은 기존의 냉전적 안보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던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사태였다. 그러나 그것이 곧 유신체제로의 전환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다.
즉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조성된 남북간 대화는 그후 곧바로 아무런 성과 없이 중단됐으며, 주한미군의 감축은 미국의 한국 포기가 아니라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으로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론 유신체제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필요성에서 비롯된 이른바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였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 한국경제가 직면했던 위기는 관료적 권위주의론이 주장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으며 노동운동 또한 정부의 경제정책이나 정치적 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7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당시 산업구조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민간기업들의 경제적 필요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한미군의 감축에 대응하기 위한 「자주국방」이란 군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유신체제의 취약한 정치적 정통성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유신체제의 유산
유신체제의 성립, 그것은 그 어떤 다른 요인들보다 국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상실한 박 정권이 점차 확산되던 반독재국민운동의 도전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연장하려는 집권 세력의 정권욕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야당과 국민 운동은 그러한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 기도를 막아낼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그만큼 강력한 군대와 경찰, 중앙정보부 등의 통치기구를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긴급조치로 일관된 유신독재 체제는 수많은 인권탄압과 민주주의 파괴를 초래함으로써 한국정치의 민주화를 결정적으로 후퇴시켰다. 특히 체제유지를 위한 정치군인의 양산은 훗날 신군부 집권의 비극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유신체제 기간동안 한국경제는 정부주도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인 시장경제질서와 소득분배를 가로막는 재벌특혜정책, 그리고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구축된 것이었다. 그리고 유신체제가 남긴 유산들로 우리 사회는 지난 20년간 또 다른 충격적 회오리 속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루어야했다.
/鄭榮國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72년 南유신·北주석체제는 적대적 의존의 '독재 쌍생아'
7·4 남북공동성명이 남북 독재체제 형성의 전조임을 증명이나 하듯 같은 시기 북한에서도 독재가 강화됐다.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보장한 유신헌법이 공포된 72년 12월, 북한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가 열려 권력구조 재편이 포함된 새 헌법이 제정됐다. 소위 「72년 사회주의 헌법」이다.
본격적인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이 헌법의 핵심은 주석제를 신설해 주석에게 국가운영의 절대적 권한과 임무를 부여한다는 것. 새 헌법에 따르면 주석은 최고인민회의에서 선출되지만 어떤 경우에도 소환되지 않는다. 주석은 무소불위의 최고국가기관인 것이다.
남한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도 절대 권력이 주어졌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가안전보장의 1차적 책임자이자 국정 지도의 최고 책임자로서 국가원수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통일정책 결정을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이기도 했다.
남북한의 독재체제가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주석제 신설은 새로운 권력기구의 창출이라기보다 이미 북한 사회의 수령으로 유일 지도체계의 정점에 오른 김일성의 지위·역할을 헌법으로 명문화한 것이다. 북한의 이론서들은 주석제를 혁명적 수령관을 제도화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반면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는 군사 쿠데타 이후 개발독재를 강행하면서 생긴 체제 효율성을 기반으로 폭발적이고 초헌법적으로 창출된 권력이다.
이같은 차이점에도 불구, 역사학자들은 양체제가 「적대적이면서 의존하는 쌍생아」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는 기간 중 남한 정치상황에 대해 이례적인 침묵을 지켰다.
이 침묵은 주석제 신설을 위한 것이었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저서 「분단시대의 통일학」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결국 유신체제와 주석체제는 적대적 의존 관계라는 분단 상황의 대표적 예였던 것이다.서사봉기자 sesi@hk.co.kr
■70년대 유신체제 연표
70년 2월 닉슨 미국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선언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40대 기수론의 김대중 지명 11월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분신 자살
71년 3월 주한미군 1개사단 철수 4월 제7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후보의 신승(95만표차) 5월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의 개헌 저지선 확보 7월 소장법관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법권 수호운동 8월 경기 광주(廣州)대단지 주민폭동사건 발생 서울대 교수협의회총회, 대학자치의 제도화 촉구 10월 박대통령, 학원질서확립 특명 9개항 발표, 서울 일원에 위수령발동 대학교에 무장군인 진주 12월 박대통령 국가비상사태 선언,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 전격통과
72년 2월 닉슨 미국대통령 중국방문 3월 노동청, 단체교섭 쟁의 규제 발표 동아일보, 지령 6,238호로 자진 폐간 6월 신민당 의원 약 80명, 비상사태선언 철회요구 가두시위 7월 7개항의 7·4남북공동성명 남북 동시발표 8월 사채동결 긴급재정명령 발표(8·3조치) 10월 박 대통령, 10·17 특별선언 발표,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11월 이후락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 방북, 김일성 면담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12월 박대통령, 제1차 남북조절위원회에 참석한 북한측의 박성철 제2부 수상 면담, 통일주체국민회의 초대 대의원 선거실시, 박 대통령, 제8대 대통령 취임
■집필자약력·연구자료
정영국(鄭榮國)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약력
80년 연세대 정외과 졸업 92년 연세대 정치학 박사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등 강사 역임
▲저서
「한국 정치·사회의 새 흐름」(공저) 「한국의 선거 1」(공저) 「한국정치과정론」(공저)
▲논문
「한국의회정치와 외교정책」 「전국구 의원의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분석」 「선거 자금과 선거과정」 「국회운영제도개혁 방안」 「이익갈등 조정제도의 비교연구」등
▲연구자료
박정희「민족중흥의 길」(광명출판사·78년)
김교식「다규멘타리 박정희」(평민사·90년)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사: 1963~1973」(73년)
한상진「한국사회와 관료적 권위주의」(문학과 지성사·88년)
한승헌 외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춘추사·84년)
류근일 「권위주의 체제하의 민주화운동 연구: 60~70년대 제도외적 반대세력의 형성 과정」(나남·97년)
최장집 편「한국자본주의와 국가」(한울·85년)
양성철 「분단의 정치: 박정희와 김일성의 비교연구」(한울·87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 민주화운동과 기독교」(8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편 「1970년대 민주화운동 I-V」(87년)
Hak-Kyu Sohn 「Authoritarianism and Opposition in South Korea」( London: Routledge, 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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