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는 순간에도 못난 아들만 생각하시던 어머니를 이제야 고향에 모시고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걱정없이 편하게 지내세요. 희로는 우리말과 우리 생활을 배워 한국사람으로 살아갈테니 어머니도 희로 곁에 있어 주세요』31년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 조국의 품, 부모님의 고향에 안긴 권희로(權禧老·71)씨는 김해공항 도착인사후 곧바로 부산 연제구 거제동 자비사로 직행, 법당에 마련된 아버지 위패, 어머니 영정 앞에서 큰 절을 하며 한동안 『살아계실 때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며 엎드려 흐느꼈다.
여동생 풍자(豊子·67) 정자(靜子·64)씨 자매와 큰고모 권소선(權小先·87)씨 등 일가친척 22여명은 권씨를 부둥켜 안고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권씨의 모습이 TV에 나오는 것을 보곤 손뼉을 치며 『건강한 모습』이라고 어린아이마냥 기뻐하던 정자씨는 막상 법당에 들어선 권씨의 모습을 보자 말을 잊은 듯 『오빠』만 되뇌며 흐느꼈다.
오후 2시10분께 자비사에 도착한 권씨는 2층 종무소에서 양복을 벗고 어머니가 생전에 지어주신 고운 옥색 한복바지저고리로 갈아입었다.
영정봉안식과 제사를 도우러 온 자비사 신도 강양희(姜良熙·38)씨는 『권씨가 한복으로 갈아입으며 어머니 생각을 하는지 옷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2시25분께 징을 치며 앞길을 인도하는 스님을 따라 3층 법당으로 올라가던 권씨는 취재진과 권씨를 맞이하러 몰려든 고국 동포들에게 『한국에 돌아와 기분이 좋습니다』라고 손을 흔들기도 했다.
3층 법당에서 권씨는 모친 영정봉안식과 부친 제사를 가졌다. 어머니 유골을 목에 건 권씨는 삼중(三中)스님이 반야심경을 송독하는 가운데 부모님께 합장과 절을 올리는 삼가의례를 봉행했다.
권씨는 향을 사르고 술잔과 흰국화를 올린 후 절을 하며 간간이 무릎을 꿇은 채 생각에 잠겼다. 고모 권소선씨는 『희로가 오빠에게 제를 올리는 것이 67년만』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전통무용가 김진홍(金眞弘·부산무용협회장)씨의 살풀이춤이 이어지는 가운데 권씨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숙소인 해운대 조선비치호텔로 향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일본 아사히TV 구와하타 유카(桑畑優香·30)기자는 『일본사람들 중엔 범죄자가 환영받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람도 있다』며 『하지만 권씨의 석방이 한일관계의 발전과 재일 한국인의 차별이 없어지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꽃을 들고 권희로씨를 찾은 박영수(朴泳洙·75·울산 동구 화정동)씨는 『72년 도쿄구치소에서 서로 알게 된 권씨는 구치소내에서도 의지가 굳은 것으로 유명했었다』며 고국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기원했다.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 고된 작업을 하다 젊은 나이에 고향을 그리며 허무하게 죽어갔던 아버지. 평생 아들의 등대로 살다 죽어서야 아들의 품에 안겨 고향땅에 돌아온 어머니.
일본땅에서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에 항거하다 31년 옥살이를 한 아들은 이제 고향의 넉넉한 품에 안겨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자비의 참뜻을 깨달은 듯 했다.
부산=안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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