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3월. 봄 기운이 채 피어오르기도 전. 사회과학전문 부정기 간행물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녹두서평」의 머리에는 50여 쪽, 따로 묶으면 얇은 한 권의 시집이 될 분량의 긴 시가 실려 있었다. 장편 연작시 제1부 「한라산」.두 달 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뛰는 가슴을 제대로 쓸어내리지도 못한 젊은이들은 또 한 번 놀라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 시를 읽어내려갔다.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어 왔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 「돌려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 4·3이여」
제주 4·3 사건을 제국주의 미국과 그 하수인들에 맞선 인민들의 무장투쟁으로 규정한 시인 이산하(39·본명 이상백)는 전투성 넘치는 이 시로 그 해 4년형을 선고받았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다. 이듬해 노태우 정권 출범 특사로 풀려나왔다. 그리고 10년 넘게 침묵했다. 해마다 4월이면 시류 타기를 좋아하는 언론들이 그의 행적을 좇아 「이제 한라산 2부를 쓸 것」이라 보도했지만, 그는 쓰지 않았다.
절필하고 11년. 지난해 이씨는 계간 「문학동네」에 시 5편을 발표했다. 「한라산」의 2부는 물론 아니었다. 「그동안, 날지 않고 울지 않는 새처럼 살았다」. 젊은 시인이 10년 입 닫았던 심경을 훌훌 털어놓은 듯했다. 고독의 냄새가 짙었고 허무의 흔적이 엿보였다. 그 시들과 함께 「한라산」을 뺀 옛날 작품을 모아 이씨는 최근 첫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문학동네 발행)를 냈다.
대학 초년 시절 그는 존재의 의미를 난해한 시어로 탐구했다. 「아무런 모순 없이 나는, `나'라고 말할 수가 없다」 「아무런 모순 없이 난, 저 빛나는 하늘의 별일 수가 없다」. 출발은 실존에 대한 반성. 「구토」와 「존재의 놀이」 연작이 그런 시들이다. 「한라산」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잠행」 「성문 밖 교회」 등도 이때 씌어졌다.
지난해부터 다시 쓴 시들은 그의 말대로 『존재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10년 전의 당당한 현학(衒學)도, 서슬 푸른 투쟁 의식도 찾을 수 없다. 대신 「낡은 것들과 새로운 것들 사이/ 문득문득 삶이 사소해 보이거나/ 그 사소한 것들이 삶의 전부로 보일 때/ 나는 밖으로 나간 나를 다 불러들여/ 저마다 동냥해온 죽음들을 나눠가지며/ 잔치를 벌인다」는 허무감, 「언제부터인가 벼랑의 나무들은/ 서로 조금씩 자리를 내주며/ 나뭇잎만한 사이를 겨우겨우 만들어/ 낡은 가지를 쳐내고/ 새로운 가지를 심는다//벼랑에 서면/ 나무가 보이지 않고/ 나무와 나무 사이가 보인다」는 삶에 대한 작은 깨달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씨의 말처럼 이번 시집에서는 「80년대와 90년대라는 두 시간대 사이의 높고 어지러운 낙차로부터 나오는 소리」가 울리고 있다.
경희대 국문과를 나온 시인은 82년 동인지 「시운동」으로 공개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남진우, 이문재, 안재찬(필명 류시화), 하재봉, 박덕규. 그때 동인들은 그 어렵던 80년대를 무사히 견디고 90년대에 안착해 있다.
그는? 그도 안착해 있을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투쟁하자고 새삼스럽게 격문을 날리지 않았지만, 그리움이며 슬픔이며 죽음을 자주 이야기하지만, 그는 수배의 몸으로 「한라산」을 쓸 때처럼 여전히 자신에게 가혹하다. 「내가 내 스스로를/ 장악하지 못하고/ 내가 내 스스로에게/ 삼엄하지 못할 때// 나는 내 발목을 자른다/ 발목을 잘라/ 뇌관을 제거한다」(「지뢰밭」 전문). 80년대 대학을 거쳐온 많은 젊은이들은 그런 가혹함을 잃은지 오래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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