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권안정용' 이해맞아 '대화'이용『7·4성명은 우리 민족의 거울이다. 이 놈을 우리 민족의 현실 앞에 걸어놓고 있으면 조만간에 가짜와 진짜가 가려질 것이다』
위 인용은 인생의 마지막을 그 누구보다 치열한 통일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로 살다가 끝내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유명을 달리한 장준하 선생이 남긴 말이다.
장준하 선생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7·4 남북공동성명은 분단 이후 통일운동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다. 특히 성명에서 합의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은 이후 통일을 향한 우리 민족의 모든 노력을 비추어보는 그야말로 하나의 거울이 됐다.
70년대 초반 남북간에 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를 비롯해 여러 갈래의 대화가 시도되더니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한 당국자들이 각기 상대방을 인정하는 조건 위에서 긴장상태 해소와 조국통일문제를 협의하고, 그 결과가 쌍방 합의에 기초하여 하나의 공동성명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뒤이은 남한의 유신체제 선포와 6·23선언, 북한의 일방적인 대화 단절로 남북대화는 곧 중단되고 말았다. 모처럼의 남북간 합의가 사문화되고, 대화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들이 국민의 주체적 각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남북한 양정권의 서로 다른 의도와 미국의 한반도 정책 변화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두 개의 한국 정책 구체화
70년대 전반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이완되고, 데탕트(해빙)가 진전되는 등 국제정세가 크게 변화했다.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정세 변화는 월남 패망이 점차 현실화하는 조건에서 미국의 닉슨 독트린으로 구체화됐다. 닉슨 독트린은 미국 동맹국들의 안전보장을 위한 군비를 당사국 정부에게 더 많이 부담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 변화에 따라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축소·간접 개입으로의 전환,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부담의 일본 이양 등이 핵심적 내용으로 등장했다. 이는 70년 7월 베트남에서 미군 5만명 철수,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군 방위력 강화 등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미국은 특히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동북아정책의 성사를 담보하고, 대소 견제를 실현하는 중요한 문제로 간주했고, 미·중 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는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가 절실했다.
남북회담은 이 시기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응한 박정희 정권의 주체적인 위기 극복책이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남북회담 추진은 사실은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대중(對中)·대소(對蘇) 역관계의 현상유지를 전제로 한반도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두 개의 한국정책」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60년대 말 주한미국대사로 근무했던 포터의 증언대로 한국과 미국은 이미 60년대 말부터 남북 간에 대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조용한 토의」를 계속해왔다.
▲박정권의 위기극복을 위한 카드
70년대 초 한국 사회는 고도성장과정에서 첨예화한 사회갈등의 폭발로 내부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71년 광주대단지사건 및 파월노동자들의 한진빌딩 옥상 방화농성의 격렬함에서 드러나듯 기층 민중의 생활은 인내의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고, 이들의 생존권 투쟁은 정권을 위기로 내몰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또 71년 봄부터 학생들의 반교련투쟁이 확산됐고, 71년 4월 범민주세력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독재정권 타도투쟁에 나서는 등 각계각층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이 점차 고양됐다.
군사정권의 대내적 통치능력을 의심케하는 정치·사회적 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박정권은 미국의 남북대화 종용에 부합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대내적 위기를 남북대화라는 카드로 모면하기 위해 북한과의 일정한 관계개선에 나섰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 위한 대남전략으로
한편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 분위기를 이용해서 60년대 중반 이래 긴장이 고조됐던 동북아 정세를 타개하고자 했다. 북한이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응한 데에는 데탕트로 말미암아 주한미군 철수론이 대두되자 이를 적극적으로 촉구하기 위한 대남전략상의 의도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 60년대에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북한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5·16쿠데타와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자 북한의 군사비 지출은 60년대에 전체 예산의 30%를 넘기고 있었고, 이것은 50년대의 15%에 비하면 2배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한편 1·21 청와대 기습사건, 울진·삼척침투사건 등 60년대 후반 군부 강경파 주도의 좌경모험주의 노선에 입각한 대남혁명전략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창봉, 허봉학, 김정태 등 군수뇌부에 의한 반김일성 음모사건이 적발되는 등 북한 정권 내부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북한 정권으로서도 이 시기에 군대의 정비·강화와 새로운 대남전략 모색 등 일정한 내부 정비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한계 불구 분단 뚫는 첫 계기 마련
7·4 성명 합의 이후 남북한 정부는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남북적십자회담, 체육회담 등 여러 갈래의 실무자 및 대표들의 접촉과 대화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정치·군사 문제의 우선 해결을 주장한 반면 남한은 경제·문화 문제의 해결로부터 통일로 접근하는 단계적 통일론을 주장했고, 남과 북은 통일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과 자세를 보였다.
7·4 성명과 남북대화는 남북한 민중에게 통일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였지만 남북 양측은 각자의 입장 차이를 끝내 좁히지 못한 채 유신체제의 성립과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이와같이 7·4 성명과 70년대 전반 남북대화는 처음부터 한계가 뚜렷했고, 또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이 준 성과와 교훈은 적지 않았다. 우선 비록 한정된 성원이나마 정치인들, 적십자인들의 남북 내왕을 실현하여 4반세기 동안의 분단 장벽을 뚫는 계기가 됐다.
또 조국통일 3대 원칙의 합의로 남과 북이 하나의 통일강령을 가지게 됐다. 마지막으로 통일운동사상 처음으로 남북당국자들의 고위정치회담을 마련하여 민족문제를 거론함으로써 통일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정용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7.4공동성명 막전막후
『서울의 이후락 정보부장은 72년 5월 2일부터 5일간 평양을 방문했다. 이부장은 평양에서 김영주 로동당 조직지도부장과 회담했으며 김일성과는 두차례 회담했다.
평양의 김영주 부장을 대리해 박성철 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했다. 박성철은 이부장과 두 차례 박정희 대통령과 한 차례 회담했다』
72년 7월 4일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분단 이후 남북 관계 최대 사건인 자신과 북한 박성철 부수상의 교환 방문 사실을 발표했다. 조간 신문이 나오고 얼마 안된 오전 10시에 터진 이 엄청난 사건을 전하기 위해 신문들은 바로 호외를 찍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의 막전 하이라이트였다.
주일대사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돌아오던 때부터 이씨는 대북 자세에서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북괴에 대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해나가겠다』. 군사력에서 북한이 여전히 월등히 앞선데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감축을 시작했고 베트남에서 패색이 짙었다. 남북대화로 북한의 요동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이산가족찾기로 남북 대화의 창을 연 이씨는 71년 9월 20일 남북한 적십자사 제1차 예비회담에 보낸 정홍진 당시 중앙정보부 국장을 통해 북한 로동당 조직 담당 책임지도원 김덕현과 접촉하도록 했다. 채널은 박정희_이후락_정홍진_김덕현_김영주(김일성의 동생이며 로동당 조직지도부장)_김일성.
남북 고위 당국자 비밀 회담의 밀사는 정홍진_김덕현이었다. 3월 말과 4월에 걸쳐 정씨가 방북하고, 또 김씨가 남한으로 오면서 이후락씨의 방북 일정이 잡혔다. 이씨는 방북 동안 두 차례 김일성을 만났고,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 역시 남한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했다. 그리고 곧 자주 외세 배격 평화통일 민족대동단결의 7·4 남북 공동성명이 결실을 보았고, 남북 조절위원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남북 문제에서 밀사 파견을 둘러싼 소문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후락씨의 방북 사건에서 비롯한 것이라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방법이야 음모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분단의 비극이 이런 돌연한 사건으로 급진전되기를 바라는 기대도 적지 않다.김범수 기자 bskim@hk.co.kr
-약력
정용욱(鄭容郁·39·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83년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96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 논문 「42∼47년 미국의 대한 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
#86∼97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연구원
#저서 「탈냉전과 미국의 신세계 질서」(역사비평사·96년·편역), 「한국현대사강의」(돌베개·98년·공저)
#논문 「1947년의 철군논의와 미국의 남한 점령정책」(역사와 현실 14호·94년), 「미군정기 이승만의 방미 외교와 미국의 대응」(역사비평 가을호·95년) 등
-1970년대초 남북대화 연표
71년 8월 대한적십자사 남북적십자회담 제의
9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첫 회의(판문점)
11월 정홍진(대한적십자사), 김덕현(북한적십자사) 예비회담 대표 접촉
72년 1월 김일성 남북한 평화협정 제의
2월 닉슨·주언라이, 한반도 긴장완화·교류증진 지지 성명 발표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극비 평양 방문, 김일성, 김영주와 회담
박성철 북한 부수상 서울 방문, 박정희, 이후락과 회담
6월 남북적십자 제20차 예비회담서 본회담 의제 합의
7월 남북공동성명 발표
8월 남북 직통전화 가설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평양서 개최. 73년 7월 10∼13일 제7차
본회담까지 서울·평양 오가며 진행
10월 남북조절위원회 제1차 공동위원장 회의. 공동성명 제1항 조국통일 3
대 원칙 해석과 실천 방법에 크게 이견
박정희 대통령,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특별선언 발표(17일)
11월 남북조절위원회 제1차 본회의
12월 북한 사회주의 헌법 공포 발효, 주석제 신설, 김일성 주석 선출
73년 6월 박정희 대통령 「평화통일정책에 대한 특별선언」 발표, 남북 유엔 동시가입 표방
8월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평양측 위원장, 남북대화 중단 성명. 김대중
납치사건 주모한 이후락 경질 요구
-연구자료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50년」(노중선 지음·사계절 발행)
「남북대화백서」(국토통일원·82년) 「평화통일민족운동사」 제2권 부록(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86년) 「남북분단과 사상적 갈등」(이용필·인간사랑) 「한국현대사」 3권 중 「1960·70년대 남북한의 통일정책과 7·4 남북공동성명」(김보영·풀빛)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중 「동상이몽의 자주평화통일 원칙_7·4 남북공동성명」(정인수·한국기자협회) 「씨알의 소리」 72년 8월호 중 「7·4 남북공동성명과 민족 재통합의 제문제」(김도현) 「민족·통일·해방의 논리」 중 「7·4 공동성명 이후의 민족 문제」(문익환·형성사) 「신동아」 93년 1월호 「7·4 공동성명 전후의 증언」(강인덕) 「북한의 통일정책」 중 「국제환경의 변화와 북한의 통일정책」(곽태환·을유문화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