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는 주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으로 독립이 결정됐지만 인도네시아 잔류를 요구하는 민병대의 무차별 폭력으로 무정부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민병대는 4일에도 리퀴차 알레우 등 5개마을에서 유엔 직원들을 내쫓았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출신의 비무장 유엔경찰관이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처럼 투표 후유증으로 인한 유혈사태가 확대되고 있는데도 「세계 경찰국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 등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자국출신 경찰관의 부상에 대해 『매우 우려스럽다』고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인도네시아 정부가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도록 안전한 상황을 조성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동티모르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도네시아 몫이기 때문에 국제적 개입 근거가 없다는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미국 등 열강들의 미온적 태도는 동티모르 보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이익이 크기 때문에 인도네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냉혹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동티모르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6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이어서 일단 개입하면 경제원조 부담도 상당할 전망이다.
미국의 경우, 동티모르에 관한한 특히 자유롭지 못하다. 70년대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화 물결이 드세지자 인도네시아를 전략적 차원에서 지원, 동티모르 점령을 사실상 묵인했다. 75년 당시 미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자카르타를 방문한 직후 미국산 무기로 무장한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를 전격 공격한 것이다.
최근 공개된 미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미군은 97년 3월 동티모르 주둔군인 「제2 지휘관 부대」에 박격포 훈련을 시켜주는 등 92~97년 동티모르 민주화운동 진압군에 30개 이상의 훈련과정을 제공했다.
다른 열강들도 마찬가지. 호주는 동티모르가 지닌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인도네시아의 폭력행위를 눈감아 줬고, 영국 프랑스 등도 무기를 팔아먹기 위해 애써 동티모르의 인권상황을 외면했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가 앞장 서 현 무정부상태를 타개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도네시아군부는 동티모르의 독립과 정치적 안정이 아체 등 다른 주의 독립을 부추길 것으로 우려, 법질서 회복에 나서기를 꺼리고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동티모르가 외세의 힘을 물리치고 홀로서기에는 더욱 역부족이다. 동티모르 독립파 지도자인 사나나 구스마오가 4일 국제사회에 평화유지군 파견을 거듭 촉구한 것은 그 길만이 현 폭력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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