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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화 기행](1)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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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화 기행](1)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

입력
1999.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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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찬씨가 최근 중국 산둥(山東)성을 다녀왔다. 산둥성은 유교와 도교의 발상지. 대륙에서 만난 동양문화와 사상의 원류는 작가의 감수성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그의 기행(紀行)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여행은 길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그것이 처음의 길일 때 여행자의 가슴은 특히 설렌다. 길 위의 바람조차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나의 첫 중국여행은 그러한 설레임 속에서 시작되었다.

여행의 성격도 특이했다. 97년부터 인하대학교가 실시한 독서여행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인하대는 첫해 학생들에게 독서과제를 부여한 후 유럽배낭여행과 만주여행을 시켰다. 국내 대학에서 처음 시행한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높은 호응을 받았으나 이듬해 IMF사태로 중단됐다 올해 재개됐다. 올해의 테마여행은 「동양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홍정선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단장으로 선발된 학생 33명이 산둥(山東)성에 있는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와 5악(五岳)으로 유명한 타이산(泰山), 황허(黃河) 일대를 답사했다. 기록자로 참가하게 된 나는 젊은 대학생들과 더불어 중국문화의 넓이와 깊이를 체험했다.

■ 중국인과 유교

중국인은 창조신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와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희귀한 정신은 우주의 근원을 하늘의 존재인 신으로부터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찾았다. 여기에서 그들의 중화사상과 함께 현세적 세계관이 싹튼다.

공자(孔子)가 태동시킨 유교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념이 중국인의 현세적 세계관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우주는 도덕적 질서에 의해 움직이며 인간의 발전은 도덕적 본성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가능하다고 역설했던 공자의 사상은, 신의 의지가 없는 질서정연한 조화가 우주의 근원적 힘이라는 중국인의 세계관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몰락한 귀족계급의 후손이었던 공자는 정치적 욕망을 품은 철학자였다. 그러나 정치가로 성공하기에는 지나치게 까다로운 원칙주의자였다. 노(魯)나라에서 초라한 관직생활을 했던 그는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14년간 북중국의 여러나라를 편력했다. 하지만 어떤 권력자도 그의 정치사상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늙고 지친 몸으로 고향인 취푸(曲阜)로 돌아와 전문적인 직업교사로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5년 후 죽었다. 이 5년의 세월이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놓을 줄 공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취푸의 공묘와 공부, 공림

공자의 고향 취푸는 인구 9만명의 작은 도시인데 도시 전체가 공자의 자취로 치장된 느낌이었다. 대표적 유적은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이다. 공묘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기원전 478년, 제자들이 스승이 살던 집을 사당으로 고쳐 제사를 지낸 곳이고, 공부는 각 시대의 행성공(공자의 적자 후손들의 벼슬이름)의 사저를 겸한 관서이며, 공림은 공자와 그 자손의 묘가 모여있는 곳이다.

특히 내 눈을 끈 것은 공묘였다. 공자의 제자들이 처음 공묘를 지었을 때는 삼간밖에 안되는 작은 사당이었다. 그후 역대 황제들이 공자의 사상을 통치이념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사당을 끊임없이 확장시킨 결과 남북의 길이 1㎞, 면적 22㏊에 466간의 건물이 들어선 거대한 사당으로 변모했다.

수많은 건축물 중에서도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의 장엄은 압도적이었다. 높이 32㎙, 길이 54㎙, 깊이 34㎙, 총면적 1,836㎙의 이 웅장한 전각은 자금성의 태화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서 스물여덟개의 돌기둥을 갖고 있다. 전각 앞 10개의 돌기둥에는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대성전의 지붕 기와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이었다. 생전에 좌절된 공자의 정치적 욕망이 죽음 이후 가장 높이 실현된 셈이다.

■ 영원히 죽지 않은 공자

직업교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던 공자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교과서를 만들어놓았고, 교육방법의 체계를 확립했다. 놀라운 사실은 역사적 실존인물로 확인된 수십명의 제자들 중에서 단 두 사람만이 귀족계급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공자는 귀족들이 누리고 있었던 세습적 특권을 과감하게 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정치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지 않았던 것은 가르침의 내용이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혁명에 의한 개혁이 아니라 도덕적 설득에 의한 개혁을 역설했는데, 이것이 권력자들을 안심시켰음이 틀림없다. 물론 권력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위장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사상 자체가 그러했다. 정치적 유토피아를 과거의 왕국인 주나라에서 찾은 것이 단적인 증거다. 하나님의 모습을 혁명적으로 변모시켜 권력자들을 자극함으로써 십자가형이라는 참혹한 죽음을 맞은 예수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전문적 교사로서 공자의 가르침은 5년에 불과했지만 몇세대후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관직을 장악한 공자학파 제자들은 스승의 사상을 천하에 알렸다.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를 학문의 「단순한 전달자」로 생각하여 스스로 글 한자 남기지 않았던 공자는 제자들에 의해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학생들은 취푸에 오기 전 벌였던 유교사상에 대한 세미나를 되새기면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대성전을 살피고 있었다. 집을 떠나 대륙을 서성이고 있는 젊은 그들은 결코 부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월의 이끼에 쌓인 유적들을 통해 세기말 너머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공묘에는 역대 황제가 공자를 추모하여 세운 비석이 즐비했다. 그중에서도 청나라 강희황제가 세운 비석은 무게가 무려 65톤으로, 그것을 제령에서 취푸까지 운반하기 위해 한 겨울 길 위에 물을 부어 빙판을 만든 후 보름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끌고왔다고 한다. 만약 공자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자신을 찬양하는 엄청난 비석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을까. 아니면 그 돌을 끌고 온 이름 없는 민중들의 땀과 피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을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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