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 달 31일 서울 행정법원이 대한생명에 대한 금감위의 행정처분을 취소하라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이번 판결은 단지 행정처분과 관련된 절차상의 하자를 문제삼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의 진정한 의미는 그동안 금융개혁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이하 구조개선법)의 타당성에 대해 처음으로 사법부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97년말 우리 나라가 소위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이후 드러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경제학자들이 조마조마하면서 속을 끓이던 문제가 세 개 있었다. 그중 첫번째가 대우였다. 다행(?)히 대우문제는 1년여를 끌다가 지난 7월 19일 이후 수면위로 부상했다. 두 번째가 이번에 논란이 된 구조개선법이다. 이 문제도 이번에 사법부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결국 대중앞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잘된 일이다.
혹자는 도대체 구조개선법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호들갑을 떠는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1년 반동안 금감위가 무소불위의 철권을 자랑하며 금융개혁과 재벌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구조개선법이 문제가 되면 그동안 이 법에 근거해 이루어진 각종 행정행위가 모두 문제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구조개선법만큼 우리 나라 금융개혁의 영욕을 한 몸에 담고 있는 법률도 흔치 않다. 이 법의 전신은 91년 제정된 「금융기관의 합병 및 전환에 관한 법」(이하 합전법)이다. 그 당시 금융분야의 화두는 대형화와 전문화였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적 장치로 탄생한 것이 합전법이었다.
이 합전법에 의해 하나은행과 같이 새로운 은행이 탄생하기도 하고 훗날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단자사의 종금사로의 무더기 전환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합전법이 97년초 구조개선법으로 전면개정되면서 이 법은 한편으로는 금융위기를 초래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위기를 처리하기도 하는 기이한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조개선법은 97년 말 급박하게 돌아가던 금융위기를 적절하게 처리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 당시 정책입안자들은 위기를 처리해야 한다는 시대적 중압감과 법적으로 허용된 권한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정책당국자는 98년 초에 몇몇 금융기관에 대한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열글자도 안되는 구조개선법상의 법적 근거를 몇번씩 곱씹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제는 이런 어설픈 현실을 치유해야 할 때가 되었다. 정책당국자가 법의 그늘에 숨은 채 멀쩡한 사람의 팔을 비틀어서 정책의지를 관철하는 관행을 언제까지나 답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한 때 시대적 상황이 워낙 급박했기 때문에 관련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위기를 돌파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이번에 재판부가 판결에서 적시했듯이 지금은 그처럼 긴급한 상황은 아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차분하게 머리를 맞대고 진정한 법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난 1년반동안 우리 사회가 주력했던 것은 「과거의 청산」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선진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보다 어려운 문제는 「미래의 설계」 부분이다. 그것은 새로운 경기규칙을 만드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 사법부가 이번 판결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해 촉구하는 조용한 외침의 참뜻인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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