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자가 본 드라마 촬영 현장의 모습들. SBS 탄현 스튜디오. 수·목 미니시리즈 「퀸」 촬영이 한창이다. 이미숙이 대사를 미처 다 못 외웠는지 대본을 컴퓨터 밑에 놓고 열심히 훔쳐보고 있다.MBC C스튜디오. 일일극 「하나뿐인 당신」의 녹화가 계속되고 있다. 10분 동안 지켜봤지만 김수미, 김윤경, 김현수 등이 놀랍게도 한번의 대사 실수를 하지 않는다. 8월초 종영했던 SBS 「해피 투게더」 야외 촬영 때. 주연 김하늘은 『오빠가 전화할 수 있었잖아요. 제가 기다린다는 것을 알면서 왜 연락 안해요』 라는 단 두 문장의 대사를 제대로 외지 못해 5번이나 NG를 냈다. 참다 못한 스크립터가 대사를 또박 또박 불러주었다.
바닥사건과 맷돌 사건
요즘 웬만한 연기자들은 대사를 외우지 못해 NG를 내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일반 드라마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쉽게 암기할 수 있는데다 대본 외의 즉흥 대사(애드립)가 약간은 허용된다. 하지만 사극의 경우는 좀 다르다. 용어와 말투가 생소하고 문장이 길기 때문.
방송가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바닥 사건」 「맷돌 사건」은 사극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이 얼마나 대사 외우기가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사극 전문 탤런트 이치우는 커닝의 대가. 신하로 출연한 그는 왕을 쳐다보지 않고 바닥에 고개 숙이고 연기하는 것을 십분 활용해 촬영 전 바닥에 대사를 빼곡하게 써 놓았다. 한 카메라맨이 이를 얄밉게 보고 촬영 직전 지워버렸다. 여유만만했던 이치우. PD의 큐사인이 나자 고개를 숙이며 『전하!…』 『전하!…』 『전하』 만을 외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맷돌 사건」은 연기자들이 흔히 대사를 적어 놓는 소품에 얽힌 에피소드. 지금은 연예게를 떠난 김철화는 맷돌에 대사를 적어놨다. 그러나 촬영이 들어가자 PD가 맷돌을 돌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지시했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어떻게 돌아가는 맷돌의 대사를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김철화는 결국 수없이 NG를 내고 동료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누가 가장 잘 외우나?
일선 PD들은 대사 외우기의 귀재로 김순철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술 좋아하기로 유명한 김순철은 녹화 때마다 대본 한번 보지 않고 나타난다. 그리고 촬영전 후배 연기자들에게 자신이 할 대사를 읽어 달라고 부탁하고는 딱 한번 듣고 바로 촬영에 들어간다. 그리고 거의 NG가 없다.
요즘 MBC 시트콤 「점프」 에 출연하는 중학생 맹세창 역시 혀를 두를 정도로 완벽하게 대사를 기억한다. 자신의 대사는 물론 선배연기자들의 대사까지 줄줄 외운다. 대사를 깜빡한 다른 연기자에게 대사를 말해주다 NG를 낸다. 이밖에 임동진 김혜자 한진희 최수종 채시라 등이 대사를 잘 외우기로 유명한 탤런트들.
대사 외우기 과정은?
연기자들은 작가가 보통 촬영 2~3일 전에 대본을 넘기면 함께 모여 대본 리딩을 한다. 그리고 각자 집에서 대사를 외우고 다시 리허설을 하면서 대사 연기를 최종 점검한다. 그러나 요즘 모든 드라마의 제작일정이 빠듯하게 진행돼 촬영 당일 대본이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동하는 승용차 안에서, 또 촬영현장에서 틈나는 대로 대사를 외워야 하는 연기자들. 이들에게 녹화는 최고의 선물이다.
배국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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