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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기어가는 철도행정/문창재 수석논설위원

입력
1999.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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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기사 스크랩북을 펼친다. 철도의 100번째 생일(9월18일)을 앞두고 20세기 한국사의 한 단면인 철도 100년사를 훑어본다. 누렇게 변색된 50년대 스크랩에서 경부고속철 기사로 도배된 근년치까지 여러 권을 섭렵했으나 근래 20여년 동안 새 철도가 개통됐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그 앞 30년 세월의 철도역사도 정체기나 다름 없기는 마찬가지다. 50년대부터 60년대 말까지 건설된 철도중 50㎞가 넘는 것은 영암선(영주-철암) 경전선(진주-순천) 정선선(예미-정선-구절) 함백선(제천-함백) 경북선(영주-점촌) 정도다. 이 밖에 서울 교외선과 충북선 등 20여개의 철도가 건설됐으나 대다수가 30㎞도 안되는 단거리 노선들이다.

광복 당시 남한의 철도총연장은 2,642㎞, 현재는 3,092㎞다. 광복후 반세기가 넘도록 500㎞도 못놓았다. 1899년 일본인 자본으로 경인선이 완공된 뒤 일제는 40년도 못되어 한반도에 6,362㎞를 건설했다. 그런데 1년에 10㎞도 못만들었으니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더 이상 새 철도가 필요없을 만큼 교통망이 잘 짜였다는 것인가.

철도적자 기사가 많이 보이는 것은 고속도로 시대 이후의 특징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고속버스가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좁혀놓은 뒤 철도는 급속한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속도도 서비스도 요금도 고속버스의 맞수가되지 못했던 것이다. 국토개발을 디자인하는 관료들의 머리에는 고속도로를 확충하려는 일념 뿐, 철도기능을 개선해 고속버스와 경쟁을 붙이려는 생각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같았다.

고속버스업자들의 서비스경쟁이 뜨거울 때 철도청은 적자보전을 이유로 요금 올리기에만 급급해 경쟁력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80년대 들어서는 철도의 공사화 아이디어가 적자병을 치료할 신묘한 약으로 평가됐으나 관리들의 자리보전 본능에 밀려 10년이 넘도록 헛바퀴만 돌고 있다. 80년대 후반에는 전국철도 일제파업으로 국민의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근년의 스크랩에 나오는 한 기사를 보고 필자는 낯이 뜨거웠다. 철도창설 90주년인 89년 9월19일자 상자기사 밑에 필자의 이름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철을 98년 완공한다는 것을 필두로 호남고속철, 동서고속철, 수원-천안간전철 연장, 경춘선복선전철화 등 16건의 굵직굵직한 사업을 90년대에 끝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이 계획대로 이행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수백만명의 독자들에게 엉터리 정보를 제공한 셈이다. 경인선 복복선전철화 사업을 보자. 96년까지 경인선을 복복선전철화한다는 계획은 이제 겨우 50% 진척됐다. 호남고속철 동서고속철은 아직도 「계획」 단계다.

이상한 것은 그 뒤에도 때만 되면 비슷한 계획이 색깔과 포장만 바꾸어 신문지면을 장식한 일이다. 때라는 것은 묘하게 선거철과 겹친다. 수도권 전철화 연장사업은 단골메뉴로 등장하지만 언제 약속이 지켜질지 아무도 장담을 못한다.

대도시 통근권역 평방㎞ 철도연장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철도투자에 무심했는지 알 수 있다. 런던 923㎞, 파리 753㎞, 뉴욕 588㎞, 도쿄 298㎞인데 비해 서울은 15㎞다. 50년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 꾸준히 철도망을 갖추었다면 지금 서울권역 교통패턴은 전철중심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폭발적인 교통수요를 방치해 수도권 전역을 자동차홍수로 몰아넣은 것은 무사안일 철도행정의 결과다.

지금 세계는 철도 르네상스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자동차로는 한계가 있음이 입증되었고, 환경문제를 푸는 방법도 철도 뿐이라는 자각에서 선진국들은 앞 다투어 새 철도를 건설하고 속도와 품질경쟁에 골을 싸매고 있다. 우리는 경부고속철도만 건설하면 만사가 끝이라는 식의 인식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 후의 연계교통망 구축과 기존철도의 경쟁력 개선에 꾸준히 투자하지 않으면, 자동차 중심의 왜곡된 교통체계는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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