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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탄생 100주년] "무능하지 않았던 선각적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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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탄생 100주년] "무능하지 않았던 선각적 정치가"

입력
1999.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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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만에 막을 내린 민주주의. 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61년 장기군사 독재의 신호탄이던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틈새」 정부로 존재했던 제2공화국. 한국 헌정사의 유일무이한 내각제 정권. 「무능과 부패」라는 비난과 「비로소 근대민주주의의 본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엇갈리는 정부.제2공화국의 수반 장면(張勉·1899∼1966) 총리의 탄생 100주년(8월 28일)을 맞아 그의 정치 업적과 인물상을 재조명하는 학술회의가 27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에서 열린다. 총칼에 밀려 제2공화국이 무너지고, 장면이 민주정부를 향한 꿈을 접은 지 실로 38년만의 일이다.

장면 총리의 호를 딴 운석(雲石)연구회와 운석기념회는 이날 「운석 장면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학술회의」에서 학계의 제2공화국 연구를 재평가한다. 특히 군사정부가 권력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선전하고 유포했던 「장면의 실정(失政)」이라는 비난, 대다수 현대사 연구자들이 내놓은 「장면은 우유부단하고 정치력이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의미가 새롭다.

학술회의에서는 제2공화국의 정치·외교·경제 정책과 장면의 역할을 살핀 「장면의 정치활동과 사상에 관한 연구」(경희대 허동현 교수), 「국제연합의 대한민국정부 승인과 장면의 역할」(유태호), 「장면 대사의 구국 외교_평가와 교훈」(동경국제대 최운상 교수), 「제2공화국 국회의 일본관과 대일 논조」(경희대 정대성 교수),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순천향대 김기승 교수) 등 논문과 더불어 장면의 신앙생활 등 개인의 면모를 살핀 「장면의 생애와 신앙에 관한 연구」(고려대 조광 교수)도 발표된다. 한국 현대사 연구가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 쓰다주쿠(津田塾)의 다카사키 소오지(高崎宗司)교수도 「일본 정계의 제2공화국관」이라는 글을 통해 장면의 대일본 정책과 당시 일본 정계의 장면 평가를 조명한다.

허동현 교수는 그동안 학계의 장면 연구를 『정치가로서 장면이 가진 어떤 결함이 5·16 쿠데타를 촉발했는가라는 결과론적 인식틀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며 장면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는 장면을 『다원화한 시민사회의 확립, 민간주도의 경제발전, 관용과 대화의 정신, 합리적 통일방향의 제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제고 등을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 아래서 실천하려 한 이상적, 선각적 정치가』라며 『부패와 무능한 정권이라는 평가는 군사 정권이 왜곡 선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광 교수 역시 장면을 『신실한 가톨릭 신자요, 양심적인 교육자며 탁월한 외교관이었고, 권모술수를 버리고 정도를 걷던 정치인』으로 이해했다. 장면 정부의 경제정책을 살핀 김기승 교수는 『제2공화국에서 추진한 국토개발사업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3공화국이 그대로 수용했다』며 경제개발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면서 그에 맞는 개발 전략을 제시한 정권으로 평가했다. 김교수는 또 장면 정권이 『질서와 발전이라는 전략으로 경제전문관료의 정책 결정 참여를 고무하고, 민간 부문의 경제정책 건의를 폭넓게 수용했다』며 경제적 질서인 절차와 과정을 무엇보다 중시한 우리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라고 분석했다.

『전차가 만원이어서, 표를 주지 못한 채 그대로 내릴 때면 전차표 한 장을 반드시 그 자리에서 찢어 없앴다』는 장면은 청렴결백의 신조를 생활은 물론 이고 모든 사회활동에서 펴보인 정치가였다. 그에 대한 조명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지는 것은 한국 현대사가 「장면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해서 더 이상 나라를 그들 손에 맡길 수 없었다」는 5·16 쿠데타 세력의 그늘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념행사 어떻게

장면 박사 탄신 100주년을 즈음해 그를 재조명하는 행사나 사진집·전집 발간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유족들은 27일 학술회의가 끝난 뒤 운석의 흉상을 서울 혜화동 사거리에 있는 동성고등학교에 세울 예정. 운석이 일제강점기 10년 가까이 교장(당시 동성상업학교)으로 있어 인연이 깊은 학교다.

유족과 운석연구회는 9월 27일 옛 동아일보 자리인 일민기념관에서 운석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과 유물을 모아 전시회도 연다. 50여 점의 사진은 물론 그의 글과 그가 남긴 안경, 시계 등 유품도 함께 전시된다. 전시회에 즈음해 사진집도 나올 예정.

운석을 새롭게 돌아보는 특집 방송도 계획되어 있다. MBC는 29일 밤 11시 장면 탄신 100주년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 「장면과 잃어버린 공화국」을 방송한다. MBC는 제2공화국이 탄생하고 이후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정치적 사건들을 운석이 숨지기 직전 육성으로 밝힌 녹음테이프를 최초로 입수해 공개한다.

운석연구회는 장면이 남긴 글을 한데 모으는 전집 발간 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앞서 67년 운석이 펴낸 자필 회고록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의 개정판이 최근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장면은 여느 정치 지도자들처럼 전기나 회고의 이야기를 남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저서와 번역서 예닐곱 권은 모두 직접 쓴 것들이다.

전집은 초대 주미대사로 활동할 때와 국내에서 정치·사회활동을 하며 썼던 신문 기고 등 짤막한 논평과 편지글을 모아 내년에 우선 1차분을 발간할 예정. 운석연구회는 또 운석의 일기를 새로 편집하지 않고 필체를 직접 보여주는 영인본으로 낼 계획도 갖고 있다. 전집 발간을 준비하는 경희대 허동현 교수는 『전집은 운석의 사상과 행동을 실증적으로 살필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범수기자

-교육자 길 걷다 정계입문

운석은 광복과 더불어 정치인이 되었지만 이전에는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두 가지 이력을 통틀어 양보할 수 없는 「본업」은 신앙인이었다.

1899년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수원농림을

졸업한 후 1920년 미국으로 유학, 맨해튼 가톨릭대학 문과를 마치고 31년 귀국해 서울 혜화동 가톨릭계 동성상업학교 교사와 교장을 지냈다. 이 때 제자가 바로 김수환(金壽煥)추기경 등이다. 이 무렵 그는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 「조선천주교공회 약사」같은 종교서적을 출간했다. 그의 3남인 장익(張益·춘천교구장) 주교는 사제의 길을 걷고 있다.

해방 후 정계에 투신해 48년 제3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 한국 승인에 기여했으며 초대 주미대사를 지냈다. 55년 민주당을 창당해 이듬해 민선부통령에 당선됐고, 60년 4·19혁명 후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로 정권을 잡았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9개월 만에 강제 은퇴당한 후 66년 지병인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총리 시절 매주 한 차례도 기자회견을 거른 적이 없다. 또 토요일마다 반드시 15분씩 「주간 정무보고」라는 이름의 대국민 방송을 했다. 몸에 밴 민주적 사고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했던 장면의 청렴하고 온화한 성품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면모가 현실 감각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하다는 혹평의 빌미가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간의 단편적 평가 뒤에 숨겨진 그의 전(全) 면모를 조명해야 한다. 특히 48년 한국수석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부분은 재평가돼야 한다.

서사봉기자

ses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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