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외환위기 이후 많은 국내 유수기업들이 외국기업들에게 매각되고 완전 매각되지 않은 성장기업들의 주식도 다량 외국인투자가들에 의해 매입되면서, 일부에서는 이러다가 외국인들이 우리 경제를 모두 사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고 있다. 이런 우려는 최근 대우사태를 맞아 대우전자가 미국 지주회사에 의해 매입되고, 대우조선이나 대우자동차 등 우리 경제를 상징하는 기업들마저도 외국기업들에게 팔릴 전망이 높아지면서 더욱 가중되고 있다.물론 외국인에 의한 경제지배의 우려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어제 오늘 생긴 것도 아니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와 다국적기업의 팽창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많은 후진국들은 2차대전 후 독립과 함께 다국적기업의 활동을 제한하였던 것이다. 물론 인도 등 일부 후진국들은 다국적기업의 활동을 지나치게 제한하여 경제발전을 저해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나 대만같은 경우는 다국적기업의 활동을 제한하면서도 적극 수용할 것은 수용하여 이득을 보았던, 다국적기업의 「선별적 유치」의 성공사례로 꼽혀 왔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반다국적 기업정책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면서, 많은 나라들이 다국적기업을 적극 유치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노선의 옹호자들은 소위 지구화의 진전에 따라 세계시장이 통합되면서 경영전략의 수립에 있어 기업의 국적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투자강대국(host country) 입장에서도 그것이 효율적으로 경영되기만 한다면 자국내에서 활동하는 기업의 소유주가 자국인인가 외국인인가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이들이 흔히 드는 예중 하나가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 유수의 식품회사 네슬레(Nesle)인데, 이들에 따르면 그 생산과 고용의 90% 이상이 스위스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기업을 스위스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독일의 벤츠가 미국의 크라이슬러를 사고, 프랑스의 르노가 일본 닛산의 최대 주주로 등장하는 등 국경을 초월한 매수-합병현상이 확대되면서 기업의 국적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제 기업의 국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인가? 좀 더 자세히 사실을 파헤쳐 보면 그렇지 않다. 네슬레와 같이 모국의 비중이 극도로 작아진 기업은 실제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다국적기업의 경우 아직도 최소한 70~80%의 생산활동과 고용이 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장기경영전략수립, 연구-개발(R&D) 등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핵심활동들(core activities)은 거의 대부분 모국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최고경영진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부가 모국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더해 다국적기업들이 관련된 경제분쟁이 일어나면 모국의 정부가 거의 어김 없이 자국기업의 이익을 위해 개입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겉으로 보기에 고도로 다국적화된 기업들도 대부분은 국적을 초월한 기업이라기 보다는, 일정한 국적을 가지고 그 활동을 국제화한 기업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기업의 국적을 따지는 것은 일부서 주장하는 것처럼 지구화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민족주의에 기반한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며 중요한 경제적 함의가 있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업의 국적은 어떤 곳에서 누구에 의해 기업의 핵심결정이 이루어지고 고부가가치 활동이 행해지는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각국 국민경제의 흥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도 기업매각 문제에 있어 좀 더 장기적인 국민경제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정책방향을 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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