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잃은 딸을 끝내 가슴에 묻지못하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아버지가 세상을 등졌다.18일 오후11시께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수대교 입구에 위치한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장영남(張英南·54)씨가 극약을 먹고 신음하고 있는 것을 행인이 발견, 한양대병원으로 옮겼으나 장씨는 22일 오후11시께 숨을 거뒀다.
94년 10월21일 오전 장씨의 외동딸 세미(당시 18세·무학여고 3년)양은 조금 늦게 일어난 까닭에 서둘러 아침을 먹은 뒤 학교로 향했다. 얼마후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날벼락같은 뉴스를 들을 때만 해도 장씨는 『설마 세미가 탄 버스가…』라며 조바심을 달랬다. 하지만 싸늘한 세미양의 시신을 마주한 장씨는 『15분만 일찍 깨워 보냈더라면…』이라는 말과 함께 넋을 잃었다.
장씨는 그러나 딸을 그렇게 쉽사리 보낼 수 없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납득할 수 없었던 장씨는 이후 『딸의 명복을 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며 술·담배를 멀리하고 94년말부터 교회에도 나갔다. 벽제화장장에서 한줌의 재가 된 딸을 보낼 때도, 92년2월 무학여고 졸업식장에서 딸의 명예졸업장을 받을 때도 『세미아버지는 딸을 떠나보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94년 당시 세미양의 담임교사 유갑례(58)씨는 전했다.
하지만 그리움을 억누를 수는 없었던 듯, 두달 전 백화점 등에 식품을 납품하는 일도 그만둔 장씨는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장씨는 『세미가 떠오른다』며 성수대교 근처를 피해다니던 아들과 부인과는 달리 사고가 난 곳을 자주 찾았다. 세미양의 오빠 세왕(28)씨는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고부터는 세미만 생각하신 것 같다』며 이를 알지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가장과 딸을 모두 잃은 부인 강순애(54)씨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벅차보였다. 문이 꼭 닫힌 장씨의 빈소에는 낮은 흐느낌만이 들려왔다.
배성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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