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경:내가 참 한심하긴 해.지수:자학 같은 거 해서 동정심 유발하려나 본데, 그만 두시지.
태경:나 너한테 어깨 힘 한 번 주고 폼 내는 게 소원이야. 유치하지? 그래도, 남보란 듯이 너한테 잘해주고 그래서 가희한테, 장인 장모한테 대단하단 소리 한 번 듣는 게 원이다.
지수: …
태경: 나도 뭔가 내가 책임을 지고 열심히 한 번 해보고 싶었어. 그런데 돈이 있어야지. (생략) 나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너 좋아하는 스테이크도 자주 사주고…
지수: (듣다가 눈에 눈물이 고인다)
소시민의 자화상
잘난 변호사 마누라한테 쥐어 살면서도 가끔은 큰 소리도 쳐보지만 늘 당하는 남자. 마누라를 팔아 사업자금을 빌리는 푼수. 처가살이를 하면서 끽소리 한 번 못하지만 앞치마를 두르고 장모를 위해 해물탕을 끓이는 착한 사위. 시어머니를 욕하는 아내에게 『울 엄마가 날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비분강개하는 아들. 아내를 들들 볶는 본가 식구들에게 『우리 좀 솔직해지자. 왜들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야, 고마운 줄을 그렇게 몰라?』며 두둔하는 남편. 그리고 가끔 예기치 않은, 가슴 뭉클한 진솔한 대사로 시청자들을 울리는 남자….
「마지막 전쟁」의 인기 속에 강남길(42)이라는 배우가 있다. 17일 방영분 시청률 33.4%. 10%대에서 시작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시청률 1위인 같은 MBC주말드라마 「장미와 콩나물」을 바짝 뒤쫓고 있다. 드라마의 첫 주연을 맡아 열연하고 있지만 그는 극중 역할에서만은 영원한 「조연」이다. 퇴출당해 소주 한 잔으로 시름을 털어내면서 큰소리 치는 소시민이자 마누라 눈치, 본가와 처가 눈치를 살피는 불쌍한 가장이다. 시청자들은 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그를 보며 좋아하고 그가 던지는 씁쓸한 웃음에 가슴 아파하는가?
영원한 달수를 꿈꾸며
「마지막 전쟁」 녹화를 위해 강남길이 일주일중 4일을 보내는 경기 의정부의 MBC 스튜디오. 하루 두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강행군. 13일 휴가를 함께 보내겠다는 두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짬을 내 스튜디오 인근 놀이동산에 텐트를 세우고 있었다. 「괜히 와서 미안해요. 아빠 생일을 축하 하러 왔어요」라는 아이의 쪽지에 눈물을 글썽이는 강남길.
대학 나와 치열한 취업 전쟁에서 탈락, 멸시를 받지만 이웃의 온갖 일에 다 참견하고 도와주는 백수(MBC 「한지붕 세가족」), 회사에서 밀려나는 상사를 끝까지 보필하는 백화점 과장 (MBC 「사랑을 그대 품안에」) , 만년 대리로 아내의 바가지만 듣지만 죽은 친구의 부모를 남몰래 챙기는 달수(MBC 「베스트극장_달수 시리즈」).
그가 맡은 역할들은 이처럼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대비돼 더 모자라게 보이지만 정과 인간미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들이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 자신은 그와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진다. 그는 그런 「힘」이 있다. 그래서 더없이 편하게 다가온다. 그는 「우리」이자 「나」이다. 그래서 그가 힘들어 할 때 우리는 가슴 아파하고 그가 킥킥 웃을 때 함께 웃어준다.
조연이 좋다
『너무 튀지 않고 남을 받쳐주는, 그리고 늘 그 자리에 있어 좋은 조연이 체질에 맞는다』 자신의 말처럼 그는 늘 조연을 자처했다. 『외모가 안 따른다』는 이유를 대면서. 작은 역이라도 성실하게 해내는 만년 조연, 강남길은 그래서 잘생긴, 영악한 주연보다 더 크게 보인다. 드라마에서 없어서는 안될 감초다. 어쩌다 이름을 알린 것도 아니고 꾸준하게 노력을 해 온 조연이기에 사랑 받는다. 「그 사람은 늘 그곳에 있다」는 식으로 주연을 빛나게 해주고 작품의 재미를 더해준다.
목동 5단지 우리의 이웃
자연인 강남길 역시 드라마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사는 서울 목동 5단지 아파트에서 그의 별명은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웃을 만나면 무조건 머리를 숙여 활달하게 『안녕하세요』 인사한다. 아내가 좀 꾸미라고 해도 옷에 돈 쓸 이유없다며 「남대문 패션」을 고집한다. 수입이 생기면 은행으로 달려가 저금하고 밖에서 마실 필요 있냐며 집에서 한 잔 한다.
자신이 쓴 컴퓨터 입문서가 베스트셀러가 될만큼 뒤늦게 컴퓨터의 대가급이 된 것은 실생활에서의 또다른 성실함이다. 일 마치고 밤 늦게 들어와서 아내가 자고 있으면 무척 서운하다는 강남길, 그는 왜 밉지 않을까.
배국남기자
kn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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