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환 경상대교수 약력등1928년 출생·71세 49년 영남대(대구대) 법과 졸업, 77년 단국대 법학박사 52년 고등고시 행정과 70~77년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77~94년 서울시립대학교 도시행정학과 교수, 도시행정대학원장 94년 정년퇴직 91~97년 서울시 시사편찬위원장
82년 한국일보사 한국 출판문화상 저작상
83년 서울시 문화상 인문과학부문
「조선시대 도시사회 연구」 일지사, 77년
「한국개항기 도시사회경제사연구」 일지사, 82년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 일지사, 90년
「한국지방제도·자치사 연구(상·하)」 일지사, 92년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 일지사, 96년
◆연구자료
한국고속도로 10년사, 한국도로공사편, 1980
강남개발계획의 전개, 손정목, 월간 「국토」, 1980년 11월
한국을 뒤흔든 6대 사건, 1988년 1월 월간 「신동아」
* 경부고속도로 건설 연표
64.12.6~15 박대통령 독일(서독)방문, 고속도로 체험
67.4.29 장충단공원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고속도로 건설 공약
67.5.3 제6대 대통령선거 박대통령 당선
67.11.14 정부·여당 연석회의 경인 경부 고속도로 건설 결정,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 추진위원회」 및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기획 조사단」발족
68.2.1 경부고속도로 서울_오산 간 기공식
68.4.3 오산_천안간 기공식
68.9.11 대구_경주_부산간 기공식
68.12.21 서울_수원간, 서울_인천간 개통식
68.12.30 수원_오산간 개통식
69.1.4 대전_대구간 기공식
69.9.29 오산 _천안간 개통식
69.12.10 천안_대전간 개통식
69.12.29 대구_부산간 개통식
70.7.7. 대전_대구간 준공, 전구간 개통식
* 경부고속도로 개통
- 64년 독일아우토반 주행후 박대통령 '대역사' 결심 -
◆아우토반과 경부고속도로 공약
「고속도로」라는,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생소했던 낱말이 처음 전해진 것은 67년 11월이었다. 그해 5월 3일 있을 제 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직의 박정희 대통령과 야당의 윤보선 후보가 치열한 선거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박대통령 후보는 4월 29일 서울에서 종합안을 제시하는 유세를 가졌는데, 장충단 공원에서 행한 이 유세에서 4대강 유역개발을 포함한 국토건설계획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그 끝부분에서 『빠른 시일내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공약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 구상을 하게 된 동기는 64년 12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의 서독 방문이었다. 그 때 박대통령은 독일이 세계에 자랑하는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을 직접 주행해 보고, 또 고속도로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 돌아왔던 것이다.
60년대 후반,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당시 군출신 행정가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은 도로건설이었다. 가장 뚜렷하게 표가 나고 오랫동안 남는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박대통령 어록을 보면 그 역시 도로혁명의 필요성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선과 건설비, 재원의 검토
67년 5월 3일에 치러졌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된 박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의 면밀한 검토를 지시하였고, 육군 공병단에서 파견된 기술장교들과 건설부 도로관계 공무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했다. 11월 14일에 있었던 정부_여당 연석회의에서 서울_인천 간 고속도로와 서울_부산 간 고속도로를 타노선에 앞서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67년 11월 14일, 정부_여당 연석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결정되자, 바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각부처 장관을 위원으로 하는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실무자들로 이뤄진 「국가기관 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도 발족됐다.
고속도로 사업 최대의 관건은 「이 고속도로가 어디를 출발하여 어디를 거쳐 어느 지점에 닿도록 하느냐」였다. 네 가지 방안을 놓고 숙의한 끝에 현재 노선인 서울 제3한강교 남단을 기점으로 하여, 부산 동래구 구단동에까지 이르는 428㎞의 노선이 확정됐다.
둘째는 얼마나 많은 건설비가 소요되며 그 재원은 어디서 염출하는가의 문제였다. 여러 기관에서 건설에 소요되는 비용을 산출했다. 건설부는 450억원, 재무부는 330억원, 서울시는 180억원, 육군 공병감실은 490억원, 현대건설은 280억원이 소요된다고 각각 추정했다. 박대통령은 서울시가 제안한 180억과 건설부의 450억원의 중간치인 315억원과 현대건설이 제안한 280억원을 검토하여 300억원으로 수정하기로 최종결단을 내렸다.
재원염출 또한 큰 문제였다. 여러 연구 끝에 68년 2월 5일 열렸던 경제장관회의에서 일반회계에 계상된 석유류 세법 등 휘발류에 대한 세율을 2배 인상키로 했다. 그밖에 95억에 달하는 도로공채를 발행키로 했으며, 대일청구권 27억원, 통행료 수입 15억원 등으로 300억원의 재원을 충당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관련, 중앙정부는 고속도로에 편입되는 용지 매수비를 최대한 줄이는 방안을 강구했다. 고속도로에 편입되는 각 시·도, 시·군·읍·면별로 후원위원회를 구성케 하여, 땅값 낮추기 경쟁을 벌이게 했다. 시장·군수들의 경쟁이 일어났다.
◆평당 평균 236원으로 매수
국유지 36만 9,000평은 처음부터 보상금 지급 대상이 아니었다. 그 나머지 민간인 토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구획정리사업이었다. 지금 관점에서 본다면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가장 피해 보는 것은 도로에 이웃한 주민들뿐이다.
그러나 당시 지방정부는 토지구획정리라는 수법을 통해 고속도로 용지를 무상 확보하는 경쟁을 벌였다.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인 제3한강교, 즉 오늘날의 한남대교 남단에서 남쪽으로 7.6㎞, 9만 2,000평의 땅이 영동 제 1호 지구에 들어가게 돼, 무상확보됐다.
그렇게 해도 확보안된 민간인 용지 582만 7,000평은 지주와의 합의로 사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민심은 한없이 순후했었다. 고속도로 용지대금을 낮추는 것이 곧 애국하는 길로 생각됐고, 백성들도 그렇게 믿고 따랐다. 582만 7,000평 용지대금으로 지급된 총액이 18억 7,667만 3,000원이었으니, 평당 평균 236원으로 매수한 것이다. 아무리 30년 전의 일이라해도 믿을 수 없이 싼 값이다. 담배 한 갑에 40원(파고다), 쌀 한가마에 4,350원 하던 때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정확한 착공일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공식적인 착공일자는 68년 2월 1일이지만, 서울_오산간의 공사는 그보다 훨씬 앞선 67년 11월 시작됐다. 단 한 푼의 예산 뒷받침이 없는 사전공사였다. 또 이 공사는 초기 설계도 채 끝나기 전에 시작됐다. 즉 설계와 공사가 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실현시키고 싶은 박대통령의 조급한 심정 때문이었다. 노선결정은 물론 공정계획까지도 박대통령이 직접 지휘했던, 「원맨쇼」였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영향
서울_수원간의 개통은 68년 12월 21일이었고, 수원_오산간은 10일 후인 12월 30일에, 오산_천안간은 69년 9월 29일, 천안_대전간은 그해 12월 10일에, 대구_부산간은 그보다 20일 뒤인 12월 29일 개통됐다.
당시 군사정부에 의한 「하면 된다」 정신으로 마침내 총연장 428㎞에 걸친 대역사가 완공된 것이다. 긴 교량 32개소, 중소교량 328개소, 횡단통로 456개소, 터널 12개소, 연동원 인원 900만명, 사망자 77명 등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 7일이었다. 대구 공설운동장에서의 준공식에서 박대통령은 『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예술작품』이라고 자찬했다.
서울_수원 고속도로가 처음으로 개통된 68년 12월 12일, 양재동 톨게이트에서 테이프를 끊고 시주한 박대통령의 뒤를 따라간 내빈들의 차는 거의가 지프였다. 그 지프의 대다수가 대통령의 차를 따라가지 못 했으며, 따라갔던 차들은 대부분 정비공장 신세를 져야했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국내를 휩쓸던 지프는 이른 시일 안에 승용차로 대체된다. 이른바 자동차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가져다 준 영향 또는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자동차 시대의 개막, 전국토 1일 생활권 시대의 실현, 엄청난 지역개발 효과와 경제개발촉진, 인적·물적 자원의 지역간 이동, 대도시 집중 가속화, 국민의식수준 향상과 평준화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은 23일에 '전태일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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