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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한순간]21. 김용택 '누이야 날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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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한순간]21. 김용택 '누이야 날이 저문다'

입력
1999.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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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시집 「누이야 날이 저문다」그 때는 정말이지 나 혼자였다. 손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고, 가슴은 늘 휑한 바람만 불었다. 길을 걷다가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 까닭 없는 슬픔, 삶에 대한 이유 없는 불안과 절망들이 수시로 나를 급습하고 괴롭혔다. 봄 밤이면 밤 바람이 불고 달이 떠 올랐다. 달이 뜨면 소쩍새는 이 산 저 산에서 밤 새워 울었다. 밤마다 소쩍새 소리에 끌려 나는 온 산을 헤매었다. 나의 절망에는 정말이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깜박 꺼져버릴 것 같은 그 아슬아슬한 절망의 끝에서 깜박깜박 불꽃이 살아나곤 했다. 그 불꽃은 때로 활활 타오르며 나와 세상을 비춰주곤 했다.

진달래꽃이 피고 소쩍새가 울면 산에는 꽃들이 피어났고, 강변에는 파란 새 풀잎들이 돋아났다. 풀잎이 돋아나는 강변을 나는 헤매었다. 해가 지면 나는 견딜 수 없어서 강으로 나갔다. 산그늘이 내린 강변은 온갖 풀꽃들이 피어났다. 하얀 토끼풀꽃, 불 송이 같은 자운영꽃, 키가 큰 개구리자리꽃, 나는 저문 강변을 헤매다가 강물에 발을 씻고 풀밭을 돌아다녔다. 풀잎들 속에 발을 들이밀면 서늘하게 개여오던 가슴을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저물면 파르르 드러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늘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나무와 나무 사이, 산과 나 사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나 사이의 긴장이 사라지면서 나는 언젠가부터 자연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자연 현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그리고 나는 시를 썼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작은 마을의 모든 자연들이 내 시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때 그 시들은 아직 자연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진 못했다. 이 말은 내 시가 내 사사로운 감정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누이야 날이 저문다」를 써 놓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섬진강」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이야 날이 저문다」는 내 시의 모태인지도 모른다. 거기 내 외롭고 쓸쓸하고, 그리고 세상을 향해 꺼지지 않을 반짝이는 눈빛이 있으니까. 나는 그 때의 나를 지금도 따뜻하게 바라본다. 아, 한없이 가난했던 깨끗한 영혼아!

어느 날 나는 달이 뜨는 강가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강 언덕에 있는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을 가득 받은 느티나무 잎들이 수도 없이 반짝이며 달빛을 털어내고 있었다. 「잎잎이 손 내밀어 받은 달빛/ 부벼도 부벼도/ 어?어? 다시 부벼도/ 묻어나지 않고/ 살 패여 피 묻어오는/ 이 아픈 사랑」(「달빛」 전문). 정말 그 때는 그랬다. 달빛이 묻어나지 않고 내 살이 패여 피가 묻어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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