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나가사키 다음의 원폭투하 목표지는 도쿄였다는 증언이 최근 일본신문에 보도되었다. 『귀관이 기장으로서 직접 도쿄에 원폭을 투하하라』 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 육군 전략항공군사령부 B29 조종사 출신인 티베츠씨는 최근 아사히신문 기자를 만나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날(10일) 루메이 전략항공군사령부 참모장에게서 받았다는 명령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나가사키 원폭투하 직후 태평양지역 항공군지휘관들이 루메이참모장실에 모여 다음 공격목표지를 의논했다. 도쿄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항공군 드뤼틀사령관은 『천황까지 죽으면 평화교섭의 상대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반대의견을 냈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괌 항공군 트와이닝사령관은 삿포로 하코다테 오타루 요코스카 오사카 나고야까지 원폭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전문으로 건의했다. 회의 4일후인 14일이었다.
■이날 도쿄의 궁성에서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누구도 항복을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 까지 싸워야한다는 군부의 1억 총옥쇄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반역이고 불충이었던 것이다. 이 때 도고 시게노리 외무상이 입을 열었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으면 일본민족은 전멸하고 맙니다』 이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듯 히로히토천황은 즉시 항복조서를 작성하도록 명령, 15일 정오 직접 발표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을 반추하는 것 처럼 재미있는 일도 없다. 10일의 작전회의에서 도쿄 원폭투하에 반대하는 의견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제3의 원폭이 미국 본토(유타주 웬드버)에 있지않고, 전선 가까이 있었다면 즉시 도쿄에 투하됐을까. 도고 시게노리가 없었다면 어전회의의 결론은 어떻게 나왔을까. 순수 한국혈통이었던 그가 어떤 심정으로 무조건 항복을 주청했는지 이맘 때만 되면 궁금해 진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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