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때로 냉정한 살인마 같다. 광폭한 자연은 온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다음날 맑고 쾌청한 하늘을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90년대 재난영화는 외국 메이저 영화사들의 단골메뉴가 됐다. 재난은 규모가 클수록, 위험이 강할수록 유혹적이다. 그런 재앙을 특수효과로 표현할 수 있는 곳은 할리우드 뿐이다. 재앙의 실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재난영화는 스펙터클 영화의 한 주류가 됐다.
「분노의 역류」(감독 론 하워드)는 화재 현장에 뛰어든 소방대원을 통해 주목받지 못했던 소방대원의 삶은 물론 그들의 인간적 고뇌를 드러내는 탄탄한 드라마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주연은 불꽃.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이 영화의 현장이 보존될 만큼 정교한 인공 불꽃 기술은 할리우드 기술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화산의 폭발로 위험에 처한 LA를 그린 「볼케이노」(감독 맥 잭슨)는 9,500만달러의 제작비중 상당 부분을 특수효과에 할당했다.
또「단테스 피크」(로저 도널드슨)는 실제 크기의 화산 모형을 배경으로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 실감나는 회오리 바람과 해저터널 폭발을 만들었다. 예측도, 대피도 불가능한 「신비의 살인자」 폭풍의 실체를 추적한 「트위스터」(감독 장 드봉) 역시 이전 어떤 영화에서도 보여주지 못한 「손에 잡히는」 시각효과를 만들었다.
재난영화가 첫 선을 보인 70년대는 순진했다. 어비 앨런이 제작한 72년의「포세이돈 어드벤처」(감독 로널드 님)와 74년의 「타워링」(감독 존 길라먼).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97년 초대형 흥행작 「타이타닉」의 원조라 할 만한 재난 영화로 1,400여 승객을 태우고 뉴욕항을 떠난 포세이돈호의 승객들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생존경쟁을 벌이는 줄거리 구조.
「타이타닉」이 어마어마한 예산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릿의 달착지근한 사랑얘기로 차별화를 꾀했다면, 한 세대가 앞선 이 영화는 거칠게, 그러나 인간의 좀 더 사실적인 모습을 그렸다. 「타워링」은 초고층빌딩을 세운 인간의 오만이 결국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스토리 구조를 통해 인간의 의지에 좀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스티브 맥킨과 폴 뉴먼의 탄탄한 연기력이 빛나는 영화.
재난영화의 제2의 붐은 날로 발달하는 과학기술과 생태계 파괴등 외부가 아닌 인간 내부에 「재앙」이 싹트고 있다는 인식이 그 바탕. 그러나 화려한 화면과 볼거리는 재앙마저도 「오락」으로 만드는 할리우드의 손 끝에서 문화적 담론은 오히려 왜소해지고 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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