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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에세이] 왜 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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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에세이] 왜 떠나는가

입력
1999.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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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날씨도 덥고 세상 일도 덥다. 불쾌지수가 덩달아 올라가 날씨도 짜증나고 정치판도 짜증난다. 휴가철이 피크를 맞아 모두들 어디론지 떠난다. 도시를 벗어나면 전국이 피서지다. 그러나 전국이 찜통인데 어딘들 안더우랴. 그런데도 떠난다. 집안보다는 길위가 더 덥다. 그런데도 길을 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찾아 떠나는가.떠나는 것은 물론 반드시 더위를 피해서만은 아니다. 휴가의 휴식을 위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여행만한 고행도 없다. 쉬기로 하자면 집에 가만히 있는 편이 더 휴식이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쉬러 간다면서 떠난다. 휴가여행이 어째서 휴식인가.

우리나라 모든 길의 시발점은 서울의 광화문 네거리, 도로원표(元標)가 있는 세종로와 종로의 교차점이다. 이 네거리의 한모퉁이인 세종로 1번지의 교보빌딩 전면에는 대형 현판이 구호처럼 내걸려 있고 이 현판에는 얼마 전까지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 하루의 반복으로부터」

이 구절은 고은(高銀)시인의 시 「낯선 곳」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떠나라/낯선 곳으로//아메리카가 아니라/인도네시아가 아니라/그대 하루 하루의 반복으로부터」

여름 휴가철을 맞아 아메리카로 떠나는 사람도 있고 인도네시아로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가느냐는 행선지가 문제가 아니다. 출발지가 문제다. 모두 자기 집에서 떠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집을 떠나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상(日常)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일상의 포로다. 하루 하루 되풀이 되풀이되는 생활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행동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늘 틀에 박혀 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상하듯이 고여만 있는 생활은 여름날의 음식처럼 시어지기 쉽다. 이따금씩 탈출이 필요하다. 이것이 휴가다. 휴가는 레크리에이션이요 기분전환이요 재충전이요 재창조다. 반드시 직장생활이나 학교생활에서의 해방만이 아니라 가정생활에서의 해방도 휴가다. 휴가는 집에서 쉬기만 해서는 안된다.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그래서 다들 집을 떠나려고 한다. 이것이 휴가여행의 정신이다.

휴가지에 가거든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몽테뉴의 「수상록」이라도 읽어 보라. 「수상록」 제1권 39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누가 소크라테스에게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여행을 하고 났는데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더라니까 소크라테스는 『그야 여행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데리고 다녔으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몽테뉴는 덧붙인다.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을 격리시킨 다음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자면 자기자신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해수욕장에서 옷을 벗듯 자신의 너울을 훌훌 벗어버려야 한다. 일상의 인습에 젖은 자신에게서 탈피한 뒤 땀냄새에 찌든 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자신으로 돌아와야 한다.

휴가 여행을 바닷가로 가거든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라. 「행운의 섬들」이란 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여행한다.」

여행을 하면서 자기와 헤어지는 것은 결국 새로운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다.

고은시인의 시 「낯선곳」도 마지막 연을 이렇게 맺는다. 「떠나라/떠나는 것이야말로/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휴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프랑스어로 바캉스란 말은 공백이란 뜻이다. 옛날 법원의 휴정기간을 바캉스라고 한 데서 이 말이 나왔다. 바캉스는 일상생활을 비우는 기간이기도 하고 자신을 텅 비우는 기간이기도 하다.

우리 국민은 평소 일상의 세태에 너무 밀착되어 있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 흥분하고 일희일비한다. 현실 속에 자신을 너무 몰입시킨다. 세상 일을 주관화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객관화할 줄도 알아야 한다. 휴가철에 높은 산에 올라 만상(萬象)을 내려다보듯, 바닷가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듯, 좀 거리를 두고 세상을 관망할 때도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노상 숨이 가쁘다. 심호흡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떠나는 휴가 여행은 그 훈련이기도 하다. 이것이 휴가를 떠나는 또 다른 까닭이다.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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