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불교철학의 심오한 세계를 통달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최근 오마에 겐이치라는 한 일본 우익논객의 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을 지켜보다 보니, 필자에게 불교의 인식론을 설명해 주려고 애쓰셨던 같은 과 교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그 교수님이 전한 불교 메시지의 핵심은 「대부분의 사람은 관념의 노예인데 집착이나 욕망, 혹은 선입견 등에서 연유하는 관념이 사람을 현혹시켜 사물의 실체를 꿰뚤어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일체의 관념이나 욕망, 집착 등을 멸해야 해탈과 성불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런데 오마에 겐이치의 글을 둘러싼 작금의 찬반 논쟁을 보니 우리 나라는 아직도 불교공부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듯하다. 찬반 양 진영 모두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을 보고는 찬반 논리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양 진영을 살펴 보면 먼저 반대하는 측은 대개 여당 고위인사이거나 경제정책을 집행해온 관료,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건 일본을 혐오하는 국민들이다. 특히 여권은 이 논객의 글이 집권층에 직격탄을 날렸다는 의미에서 어떻게 해서든 이 글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데 혈안이 된 느낌이다. 관료는 관료대로 비록 자신들이 「아무 생각없이 해온 일」이기는 하지만 정작 그동안의 개혁이 헛수고였다는 비판을 듣고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야당이나 재벌, 그리고 재벌의 이해를 기꺼이 대변해 온 일부 식자층은 이 글을 현 정부의 정책을 공격할 호재로 보고 있는 느낌이다. 야당은 여권에 대한 훌륭한 공격거리를 찾았다고 행복해 하고 있으며, 재계나 그 주변을 맴도는 학자들 역시 마치 그간의 재벌개혁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붙어 먹는 정책이나 되었던 것처럼 목청을 높이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이 여느 글처럼 나름대로 경청할 측면과 무시해야 할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런 글이라고 본다. 특히 한국 경제가 적어도 현상적으로 상당 부분 엔화 가치에 목을 매고 있다는 점, 한국 사회의 발전전략에 관한 장기적 비전이 부족하다는 점 등은 이 글의 문제의식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가 진정으로 숙고해야 할 부분이다. 경쟁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재벌제품이 실속이 별로 없는 껍데기라는 비판이나 조만간 재벌의 대반격이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 등에 대해서도 겸허히 수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 산업은 조만간 백전백패할 것이고 따라서 시급히 산업구조를 일본회피적(?)으로 개편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나, 마치 한국이 살 길은 재벌을 계속 현재처럼 용인하고, 미국과는 겁없는 정면대결을 벌이는 것이라는 식의 해석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 글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인 표피적 차원의 반응이다. 물론 이 글이 집권 핵심부를 매우 자극적인 언사로 공격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여권이 그토록 호들갑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이 글과 관련해서 진정으로 숙고해야 할 점은 정말 앞으로 몇십년 동안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떤 경제구조가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단순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구호만으로 빵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며칠 있으면 광복절이다. 일제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 무엇인지 현재의 집권층이 다시 비전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그 비전이 무엇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먼저 헛된 집착에서 자유로와야 한다는 점 만큼은 확실한 것같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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