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로 회귀하는 길이다. 인간과 인간이 부대끼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된다. 한여름밤, 꿈의 여행길이다. 탑승 티킷의 이름은 「햄릿 프로젝트」. 우리 시대 악(樂)·가(歌)·무(舞)가 자연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7일 첫 공연날. 경기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 야외 무대 초입에는 마을 아낙들이 차일을 치고 잔치국수를 팔았다. 뙤약볕 내리쬐는 중부 고속도로를 달려 온 150여 관객들은 조미료 없는 시골 국수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우고 둥그렇게 둘러 앉는다. 1시간 30분의 연극, 아니 제의(祭儀)를 위해서.
끝나면 사람들은 퍼뜩 꿈에서 깬 듯 머리를 들어, 바로 위 하늘을 본다. 금세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별과 별. 아니, 별이 저렇게도 많았나. 『새도, 벌도 이 야외무대에 집을 짓고 싶어 하지요』 극단 무천(舞天)의 대표 김아라(43)씨.
김아라의 연극공동체
저수지옆 무논 1,500평을 자신의 극단 식구들과 함께 3년여 다져 만든 연극실험장 「무천 캠프」의 주인, 아니 여사제다. 그는 4년째 여기에 살고 있다. 남편 김ㄱㅁ(43), 딸(10), 친정 어머니(74)가 바로 곁에 있으니, 뭣보다 고맙다. 지금은 무천의 식구 22명(배우 17명과 스태프 5명), 자원봉사자 10명(대학생, 연극동호회원, 무대미술 전공학도)과 함께 생활한다. 집 뒤켠의 텃밭 400평에서 키재기하는 열일곱가지의 야채가 그들의 식탁에 오른다. 무천 캠프는 낮이면 마을 사람들의 놀이터. 『여기서 나는 뭣보다 이곳 주민이죠. 막 올리기 전이면 식구, 강아지와 함께 바로 옆 호수를 돌아요』
무대와 객석 다 합쳐 500평, 8각형의 얕은 연못, 중앙에 지름 3㎙의 원형무대, 4단의 계단식 좌석에 500~600명은 앉아 볼 수 있다. 극장에서 50여㎙ 떨어진 그의 집까지는 두길짜리 나무 장승 14개가 길을 안내한다.
세계에도 찾기 힘든 연극 공동체다. 『예술만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은거죠』 오기 같기도, 원초적 에너지 같기도 한 김아라의 자기 선언이다.
극단 무천의 작품들
92년 그가 창단한 극단 무천은 95년 「이디푸스와의 여행」으로 제19회 서울연극제에서 대상 연출상 등을 석권, 존재를 알렸다. 97년 현재의 장소에 야외 무대를 만들어 그들만의 제의를 시작했다.
그해 8월 열흘간 벌였던 다국적 음악극 「오이디푸스」이 첫 무대. 무용가 홍신자, 인도음악가 김창수, 피아니스트 임동창, 조각가 진철문 등 국내 전위 예술가에다 영국 덴마크 등 5개국의 전위들과 빚어낸 제의였다. 이후 죽산을 거점으로 한 그의 연출은 98년 예술의전당 「내마」, 99년 3월 유 시어터 「햄릿」 등 외부와 교감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전통적 장르 구분은 그를 만나 하릴 없게 된다. 야외무대, 복합 장르 무대, 대형 무대 등을 합친 총체예술 정도면 비슷해질까.
올해 그는 두 편의 「햄릿」을, 그것도 서로 극과 극의 어법으로 해석해 올렸다. 3월 서울 강남에 유인촌씨가 문을 연 유 시어터 개관작이었던 「햄릿」과 이번의 「햄릿 프로젝트」(별도 기사 참고).
「카리스마의 연출가」라는 진작의 평이 눈앞의 현실이 됐다. 『엄청난 에너지와 집중력』 『한치 양보 없는 추진력』…. 그것들은 지금 극단 무천과 무천캠프를 지탱해 가는 힘의 원천이다.
무천캠프가 가는 길
연출 작업이란? 『공동체적 경험으로서 축제의 제의성을 복원, 장르 해체 이전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라고 김아라는 말한다. 그런 당신은 누구인가? 『제의에서 서커스까지 모든 연희 형식을 연구, 여러 사람들의 에너지를 한 데 모아 내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그럼 목표는? 『새로운 장르의 창조다』 질문의 꼬리를 물고, 곧바로 나오는 그의 대답에서는 일말의 흔들림도 감지되지 않는다. 북극성처럼, 그의 확신은 아름답다.
문예이론가 게오르그 루카치는 1914년 「소설의 이론」에서 말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세계와 자아, 하늘의 빛과 내면의 불꽃이 서로에 대해 낯설지 않았던 꿈의 시대, 지금 김아라의 무천 캠프가 가는 길이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김아라씨 약력
56년 전남 광주 출생
이화여대 사대 부속고등학교 졸업
중앙대 예술대 연극영화학과 수료
뉴욕 시립대, 헌터 칼리지 연극학과 졸업
91년 「사로잡힌 영혼」으로 제28회 백상예술대상, 제29회 동아연극상 연출상 등 수상
93년 문화체육부 선정 「제1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95년 제19회 서울연극제 대상, 연출상(「이디푸스와의 여행」) 수상
주요연출작/「에쿠우스」(90년), 「사로잡힌 영혼」(91년), 「이디푸스와의 여행」(95년), 「이 세상끝」(96년), 「오이디푸스」(97년), 「내마」 「인간 리어」(98년)
- 햄릿 맡은 리더 '김형태'
「햄릿 프로젝트」는 마로위츠의 「햄릿」이 원본. 영국 연극 전통을 대표하는 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63~64 시즌에 대연출가 찰스 마로위츠와 피터 브룩이 공동 연출해 초연한 작품이다. 「잔혹」에 초점을 두고 원본을 해체, 재구성했던 화제작.
햄릿이라는 인간상에 대해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된 몇 가지 통념을 여지없이 분쇄, 완전히 다른 의미의 지평으로 객석을 내던진다. 시대를 잘못 만난 고결한 인격의 왕자,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비극적 파국을 당하는 인물 등 지금까지 햄릿은 안이하게만 소비돼 오지 않았던가라는 데 대한 연극적 반성이자 반동이다.
김아라씨는 『햄릿이 가진 다의성(多義性)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연출의 초점을 뒀다』며 『정치극 가정극 복수극에 머물렀던 「햄릿」을 해체와 재구성의 매력적 텍스트로서 해석했다』고 말했다. 각각의 대사 자체를 두고 봤을 때, 변한 것은 없다. 그러나 대사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본래의 의미는 탈색돼, 결국 대사와 대사가 서로를 조롱하고 공격하도록 하는 기묘한 효과가 좋은 예다. 29일까지 매주 금·토·일 오후 8시 무천야외극장. (0334)675_1564
/장병욱기자
- 김형철 '강렬한 이미지의 완전초보'
「햄릿 프로젝트」 최대의 관심은 단연 타이틀 롤 햄릿이다. 이번 햄릿은 햄릿 공연사에서 독특한 전범으로 남을 것이다.
김형태(34). 그는 한번도 연극을 해 본 적 없는, 연극에서는 그야말로 아마추어다. 언더그라운드 「황신혜 밴드」의 리더로, 작곡 보컬 기타를 동시에 겸한다.
5월 예술의전당 콘서트에서 김아라씨가 그 강렬한 이미지에 반해 직접 제의하게 됐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터라, 연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던 그는 그러나 뜻밖의 제의를 받은 뒤 무섭게 몰두했다. 하루 12시간 대사 외는 데 매달리다보니, 한 달도 채 못 돼 다 외워 버렸다.
『멀티 아티스트적 면모에, 다중적 성격이 이번 햄릿과 딱 부합되는 것 같았죠』 그를 잘 아는 동료 뮤지션들은 그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듣고, 『올 게 왔다』라며 축하했다. 그는 연출자가 전례 없는 햄릿을 원한다는 걸 재빨리 읽었다. 유인촌의 「햄릿」을 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괜시리 「연극적」으로 변할까봐 해서요』
연출가로서의 김씨를 말한다면? 『잘게 다그치는 스타일이 아니죠. 부정적으로 평하거나, 연기 주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좋다고 얘기한 것들만 합한 게 지금의 햄릿이라고 보면 돼요』 배우들을 끌고 나가는 방식이 뭣보다 좋았다는 말.
이번 연극을 계기로 「엘리펀트 맨」을 모노드라마로 연기해 보고 싶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인디 레이블 도시락(圖詩樂)의 대표이기도. 그의 결론, 『똑똑한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건 정말 즐거워요』
/장병욱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