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우리나라 초등학교 졸업생의 중학교 진학률은 15.6%(46년), 16.8%(47년), 20.8%(48년), 19.7%(49년), 25.8%(50년)로 점차 향상은 되고 있었으나 여전히 매우 낮은 상태였으며, 이는 결국 중학교 입시를 둘러싼 과열 경쟁으로 이어졌다.특히 미군정의 서울중심 교육정책으로 인해 지방 중학교의 입학지원자는 격감하고, 서울에 있는 우수중학교 입학지원은 급증하는 양극화 현상이 문제였다. 이 시기의 중학교 학생 선발권은 전적으로 각 학교에 있었으며, 초등학교에서의 학습결과를 중등학교 입시에 반영하기 위해 교장추천제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노력이 기울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입시제도의 학교별 관리는 일부 교직원들과 학부형들, 그리고 학원모리배들에 의해 부정입학의 수단으로 악용됨으로써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다.
한국전쟁은 입시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입시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국가적 낭비를 최소화하고, 입시의 공정을 기한다는 명분하에 중등학교 국가연합고사제도가 도입되었다. 중등학교 입시의 국가관리, 선시험 후지원제, 객관식 시험 등 입시제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남겼던 이 제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의 최대, 최선의 시책」이라는 찬사에서부터 「민주주의의 원칙에 배치되는 제도」라는 비판까지 다양한 평가가 제기되었다.
국가관리제도는 우리나라 현대교육에 몇가지 치명적인 흔적을 남겼다. 국가가 학생선발권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하고 교육 내용의 획일화를 가져오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선시험 후지원제는 학교의 서열화 현상과 소위 「눈치작전」이라는 병리현상을 가져왔다. 관리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객관식 시험의 채택으로 인해 암기식 학습행태를 만연시키는 부정적 역할도 하였다.
학교별 선발과 국가관리라는 양극단적인 입시제도를 경험한 후 54년부터 68년까지 14년간은 거의 매년 입시제도가 바뀌었다. 다양한 입시제도의 실험기라고 할 수 있는 이 기간동안 시도해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입시제도들의 장단점을 체험하는 성과 아닌 성과를 거두었다. 반복되는 입시제도의 실패와 만연한 입시부정은 결국 학교의 학생선발권과 학생의 학교선택권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의 제도개혁을 합리화하였다. 65학년도 서울시내 몇몇 일류 중학교 입학시험 문제를 둘러싼 이른바 「무즙 파동」, 65년에 있었던 고교 「입시문제 누설소동」, 66년 초등학교 학구위반사건, 68학년도 입시문제와 관
련된 이른바 「창칼 파동」 등을 겪으면서 학생선발이 사법적 처리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결국 교육의 권력 종속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연속되는 입시파동 속에서 획기적인 개혁조치를 강구해 오던 중 68년 7월 15일 문교부는 일종의 교육혁명을 단행하였다. 권오병 당시 문교부 장관은 이날 69학년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중학교 입학을 무시험제로 바꾸겠다는 입시안을 발표하였다. 「7·15 어린이 해방」이라고 불리었던 이날 발표의 주요 내용은 『69학년도부터 중학교 입학시험 제도를 폐지하고 중학군을 설치하며 추첨으로 입학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중학교 입학을 둘러싼 지나친 경쟁을 완화하고 평준화를 이루기 위해 세칭 일류 공·사립중학교 14개교를 연차적으로 폐지하고 시설은 고등학교로 전용한다는 계획도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69년 2월 5, 6일 서울시내 중학교 입학지원자에 대한 추첨을 시작으로 70학년도에는 10대도시, 그리고 3차년도인 71학년도에는 전국적으로 추첨에 의한 중학교 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경기, 경복, 서울, 경기여중, 이화여중 등 10개교가 68학년도 입학생의 졸업과 함께 폐지되도록 69학년도부터 연차적으로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였다.
이 조치에 대하여 입시경쟁으로 인한 심리적 부담과 사교육비 부담으로 고민하던 당시의 학생, 교사, 학부모 등은 적극적으로 지지와 환영을 표시하였다. 「교육연감」(69년)은 당시 국민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문교부에서 입시 폐지의 결정이 발표되자 국민들은 물결치는 갈채, 갸우뚱한 의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체적으로 보도기관을 통한 여론을 위시해서 입시지옥에서 헤매는 어린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정부의 용단을 대부분은 크게 찬양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입시개혁, 교육혁명, 경우에 따라서는「7·15 어린이 해방」이라는 용어가 나오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교육사상 일종의 구테타라는 표현까지 나돌기에 이른 것이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의 도입은 교육기회의 실질적 확대, 아동의 정상적 발육의 촉진, 초등학교 단계에서의 과열과외 해소 등 일부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에 몇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중등교육에 있어서의 다양성의 실종이나, 평준화로 인한 교과지도의 어려움과 같은 교육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학생들의 위장전입으로 인한 수도권 인구집중이라고 하는 사회문제도 유발하였다. 무엇보다도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는 중등교육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완성시키는 대가로 각 학교가 누려야 할 자주적 학교 운영권,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학생들의 학교선택권을 박탈한 개혁이었다.
69학년도부터 시작된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는 초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에는 상당한 기여를 하였으나 고등학교 입시 준비교육을 치열하게 하여 중학교 교육을 비정상화하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특히 무시험으로 중학교에 입학했던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시작한 72학년도의 고등학교 입시는 극히 치열하였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마련을 위해 문교부에 「입시제도연구협의회」가 구성된 것이 72년 12월 18일이었다. 이 협의회에서 마련한 입시제도에 관한 연구결과가 73년 2월 28일 문교부장관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되었고, 3월 13일에 문교부는 최종 확정안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졸속으로 마련된 고교평준화는 74학년도에 서울과 부산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75학년도에 대구, 인천, 광주를 포함한 5대 도시로 확대되었으며, 79학년도에 전국 12개 도시, 80학년도부터는 전국 20개 도시 지역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81학년도에 창원시가 마지막으로 평준화 지역에 포함됨으로써 전국 21개 도시 모두에 적용되게 되었다. 평준화 지역이 가장 확대되어 있었던 83년 당시에 학교비율로는 전체의 38.8%, 학생 비율로는 57.9%가 평준화 정책의 적용을 받고 있었다.
고교 평준화가 학력의 하향 평준화를 가져왔다는 비판과 학생 및 학부모의 학교선택권 요구를 반영한 교육개혁심의회의 건의에 따라 86년부터 평준화 정책의 적용여부는 시·도교육청에 위임되었다. 실제로 89년부터 지역별로 평준화 해제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하여 95년에는 14개 도시지역에서만 실시되었으며 99년 현재는 많은 논란속에 전국 17개 도시에 적용되고 있다.
해방이후 가장 성공적인 교육정책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고교 평준화 정책은 명성과는 달리 우리나라 교육정책의 비민주적, 비교육적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불과 3개월도 못되는 짧은 기간의 연구를 토대로 단 한번의 여론 수렴과정없이 정책이 확정되어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은 우리나라 교육정책의 추진과정에서 항상 목격되는 「국민은 교육의 대상일 뿐이다」라는 비민주적이고 군사문화적인 사고의 전형적인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교 평준화 정책은 또한 교육의 도구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정책 사례였다. 교육시설이나 교원의 평준화를 위한 투자 계획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의 평준화 정책이란 단지 경쟁적 고교 입시가 야기한 사회문제, 즉 인구의 도시집중, 재수생 누적에 따른 사회 불안 등을 해결하기 위한 교육적 처방에 지나지 않았다. 교육이란 단지 그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도구주의적 사고가 우리의 교육 정책 주도 계층에 만연되어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정책의 한 예였다.
평등주의를 앞세운 국가권력에 의해 중등학교 학생 선발권이 독점적으로 행사되어온 지 30년이 되었다. 중학교 무시험 제도나 고교 평준화 정책이 추구했던 대중교육론적, 평등주의적 이상이 자율성과 수월성을 강조하는 엘리트주의적, 자유주의적 관점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현대사 다시쓴다] 60.70년대 입시파동 실태
64년 「무즙(汁)파동」은 우리나라 과열 입시제도의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 왜곡된 교육열이 빚어낸 대표적 사건이었다. 64년12월7일 65학년도 서울시 전기중학 필답고사 정답이 발표되자 서울시 교육위 중등교육과에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국어 산수 사생 자연 20개의 문제에서 복수정답이 나왔다.
특히 엿을 만드는 과정중 당화(糖化)작용을 하는 물질을 묻는 질문인 자연 18번 문제가 「문제」였다. 출제위는 정답이 「디아스타」라고 발표했으나, 학부형들이 「무즙」 역시 정답이라고 항의가 빗발쳤다. 곤혹스러워진 출제위는 자연과목의 두 문항을 「백지화」해 모두 점수를 주겠다고 발표하자, 12월10일 오전 9시 경기중 지원자의 학부모 30여명은 서울시교육위원회에 몰려와극렬 항의했다. 서울시교육위원회는 11일 또 번복했다. 농성중이던 부모들에 굴복, 두 문제를 당초 정답대로 처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학부형은 만세를 부르고, 화가 난 학부형들은 학교로 달려가 교장의 멱살을 잡는 등 유례없는 혼란이 계속됐다. 결국 이대로 채점이 완료돼 합격자를 발표했다.
65년2월25일 서울고법 특별부는 자연 18번 문제의 정·오답을 밝혀내기 위해 서울시교육위원회에 출장 공판을 열었다. 학부형 42명이 무더기로 제기한 「입학시험 불합격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해당중학교가 내린 입학시험 불합격 처분을 취소하고 합격자임을 확인한다」고 판결했다. 학부형들은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고물까지 묻혀 왔는가하면, 찬합에 무즙을 가득 갈아오는 등 「증빙」자료를 챙겨왔다. 문제는 더욱 커졌다. 승소한 학생들다 른 중학교에 다니다 국회의원의 「빽」을 업고 교육법시행령상으로는 불가능한 학기중 경기중으로 전학을 갔고, 이 틈을 타 일부 부유층및 사회지도층 자녀 15명이 부정입학을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김규원 당시 서울시교육감, 한상봉 차관 등이 사표를 냄으로써 수습됐지만 갈팔질팡한 입시제도와 고관대작 부인들의 한국 치맛바람이 어울려 유례없는 입시 혼돈이 빚어졌다.
「창칼 파동」도 있다. 68학년도 신입생 선발을 위한 전기중학교 시험의 미술 13번 문제는 목판화를 새길때 창칼을 바르게 쓰는 법을 물었다. 낙방생 부모들은 경기중학이 시교육위의 채점기준을 따르지 않았다며 시위를 벌이고 교장과 교감을 연금하는가 하면, 소송까지 제기했다. 필경사와 고교 교사가 결탁, 문제지에 정답을 비뚤게 표시하는 방법으로 부정시험을 치른 것이 발각돼, 1만4,000여명의 수험생이 재시험을 치른 74년 1월 「경북 제1지구 입시부정사건」 역시 한국의 왜곡된 입시정책의 표본으로 꼽힌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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