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이란 긴 세월의 폴란드 우츠국립영화학교 유학을 마치고 지난달 말 그는 돌아왔다. 96년 데이콤 CF에서 서울에 있는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렸던 한 유학생. 그가 바로 지난 5월 한국영화 사상 첫 칸영화제 단편부문 심사위원상 수상작인 「소풍」(35㎜, 14분)을 만든 송일곤(宋一坤·28)이다. 「소풍」은 8일 폐막되는 호주 멜버른 국제영화제 단편부문 대상에도 선정됐다.이제 사람들은 CF를 들먹이지 않아도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소풍」은 어느 가족의 동반자살을 치밀하게 그린 영화. 그는 『한국적 소재와 색깔과 정서로 폭력성을 드러낸 영화』라고 말한다. 『시나리오에는 사업실패와 빚 때문이란 이유가 있었지만 오히려 주제가 사회성으로 축소될 것 같아 빼버렸다. 대신 유럽에는 용어조차 없는 가족동반자살의 폭력성과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을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면서 보여주려 했다』
칸영화제 수상후 그가 심사위원에게 『동반자살의 이유가 궁금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 역시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였다.
「소풍」의 시나리오는 4년 전에 썼다. 신문에 실린 넉줄 짜리 가족동반자살기사를 읽고서였다. 「소풍」은 시련의 선물이기도 하다. 지난해 그는 장편영화 데뷔 꿈에 부풀어 휴학까지 하고 서울에 왔다. 홍콩 왕자웨이(王家衛)가 제작하고 그가 감독과 시나리오를 맡을 장편영화를 위해. 그것이 무산됐다. 갑자기 자신이 「죽어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돌파구로 「소풍」을 찍었다. 3년전 CF출연으로 인연을 맺은 조병모 촬영감독이 필름을 주었다.
이처럼 그는 『늘 행운이 따랐다』고 했다. 96년 영화는 고사하고 학비가 없어 쩔쩔맬 때, 우연히 찾아온 CF출연으로 800만원을 받아 다큐멘터리 「광대들의 꿈」을 찍었고, 그 작품으로 받은 상금으로 「간과 감자」를 찍고, 그것이 또 상금을 받게 해줘 「소풍」을 찍고…. 그래봤자 그가 지금까지 받은 상금은 2,000만원. 한편의 제작비도 안된다. 「간과 감자」 제작 때는 우츠영화학교가 1만달러를 지원했다.
학교가 그에게 준 또 하나의 귀중한 선물은 창작자로서 인간에 다가가는 자세. 다큐멘터리를 배우면서 문득 그는 한국에서 영화공부가 모방만 하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영화인생도 이처럼 어느날 갑자기 시작됐다. 모든 것에 저항하고 싶었던 고교(영동고) 2학년때 우연히 본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의 「퍼블릭 우먼」에서 그는 자신의 표현수단을 발견했다. 『왜 영화를 하는지 아직도 모른다. 운명의 힘이 나를 이끄는 것 같다』
7일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지리산 산자락(전남 구례)으로 숨어든다.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다큐멘터리도 찍고 장편 데뷔작이자 졸업작품이 될 「칼, 폭력의 구조」(가제)의 시나리오도 쓸 계획이다. 「간과 감자」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폭력의 상관관계를 조명했다면, 「소풍」은 폭력과 그 희생, 「칼…」은 폭력의 구조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왜 송일곤은 고집스럽게 「폭력」을 화두로 삼고 있을까. 중학시절 아주 가까운 사람이 폭력에 희생당했다. 『그 기억이 학교와 사회와 조직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났고 영화를 시작하면서는 인간과 역사와 폭력의 고리에 집착하게 했다. 폭력과 희생의 80년대를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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