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스카라 극장을 중심으로 건너편은 가요 골목, 극장 쪽은 영화인들 골목이 있었지. 신카나리아가 운영했던 「모나미」 다방에서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 「동백 아가씨」, 배호의 데뷔곡 「두메산골」과 「돌아가는 삼각지」 그런 노래가 탄생한기라. 한 때 시냇물까지 흘러 「스카라 계곡」으로 불렸던 그 동네를 이제는 「가요의 거리」로 이름 붙여야 마땅하지』만 나이로 여든 둘, 작사가 반야월(半夜月·본명 박창오)씨는 혈기왕성하다. 악수를 하면 웬만한 젊은이도 흉내내지 못할 악력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손아귀의 힘보다 더 또렷하고, 정열적이다.
올해는 그가 「넋두리」 「꽃마차」로 작사가 생활을 시작한 지 꼭 60년 되는 해. 지난 1일 83회 생일잔치가 열린 충무로 진고개 식당에는 원로 가수와 작곡, 작사가 250명이 모여 그의 작사생활 60년을 기념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다시 「가요의 거리」를 주창했다. 도도한 우리 가요계의 역사의 상징으로 거리라도 하나 만들어 놓고야 말겠다는 것이 그의 요즘 목표이다.
그는 가요계의 산증인이다.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고향초 등 10개의 예명을 번갈아 사용했던 작사가, 「꽃마차」를 불렀던 가수 진방남(秦芳男),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로 그는 5,00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처럼 왕성한 활동을 했던 그이기에 나이 여든 넘었다고 구들장 신세나 지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용납치 못할 일이다. 맥주 5병으로 「초거리」를 시작, 몇차례 차수를 바꾸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타고난 건강을 가졌다.
그는 『노래는 음식』이라고 정의한다. 그렇게 뼛속 깊숙이 자리잡은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실타래 풀면서, 칼질 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좋은 노래인데, 요즘엔 그저 배꼽티나 입고 나와 몸이나 보여주지 도대체 살아있는 시적 정서가 없다』고.
사실 많은 작사가중에 유달리 그의 이름이 크게 남은 것은 시대 시대 마다의 상황을 여러번 조탁을 거쳐서 노랫말로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말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울고넘는 박달재)는 박달재 고개 성황당 앞에서 본 부부의 이별 장면이 모티프가 됐다. 해방 후 가난때문에 타지로 떠나야 하는 민초들의 애달픈 사연. 전쟁으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슬픔을 「장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표현한 「단장의 미아리 고개」, 고향 잃은이의 심경을 그린 「찔레꽃」 등 그의 노래는 세상을 향해 언제나 문을 열어 두었다. 『서민적 시각을 가지되 문학적 향기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작사 철학이다.
『작사가의 마당이 어디야. 레코드 회사 아니야. 그런데서 다 손을 놓고 있으니, 무슨 가사를 적어. 노래도 마찬가지고.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고 형편이 안돼서 그냥 있는 거지』 요즘은 왜 활동이 뜸하냐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열을 내어 말한다. 그는 청년이었다.
/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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