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0일 오후 2시 KBS 별관 11층의 기획실. 사무실의 열기는 바깥보다 더 뜨겁다. 「일요 베스트」 극본 공모에 접수된 작품을 6명의 PD들이 한달째 심사중이다. 컴퓨터로 깨끗하게 엮은 극본에서 원고지를 정성껏 메운 작품까지 무려 2,400여 편. 방송사 단일 공모로는 아마 기록적인 응모량이 될 것 같다. 이중 여성 응모자는 90%.같은날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금산빌딩 방송작가협회 부설 방송작가교육원 401호실. 6개월 과정의 기초반을 수강한 뒤 시험을 거쳐 강사 유호(방송작가)씨의 수업을 듣고 있는 드라마 연구반 학생들. 수강생 30명중 남자는 2명. 나머지 28명이 주부거나 미혼여성이다.
드라마 작가는 꿈의 동의어?
여성들의 드라마 작가 지망 붐이 요즘 열풍에 가깝다. 「극작가 신드롬」이다. 각 방송사 부설 방송아카데미나 서강대 이화여대 등 대학들의 방송교육원, 그리고 언론사 및 백화점 문화센터 방송작가반 강좌에는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명의 여성들이 극작가를 꿈꾸며 습작을 하고 있다. 독학하는 여성들까지 합하면 수를 짐작할 수 없다.
7월초 발표한 MBC 「베스트극장」 공모. 3,100여 명이 응모했다. 이중 여성은 80%. 수상자 6명중 최우수작 고은선(28), 우수작 소현경(34)씨 등 5명이 여성. 이제 수많은 여성, 특히 고학력 미혼여성과 주부들에게는 김수현 김정수 이금림 송지나는 더 이상 고유명사가 아니다. 꿈이요, 희망의 동의어다.
왜 드라마 작가를 꿈꾸나
우선 영상 매체, 특히 드라마의 매력. TV의 대중적 영향력이 급증하면서 한때 글깨나 쓴다는 여성들은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현실로 다가 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창작 열기를 불태운다. 최상식 KBS 드라마국장의 설명. 『많은 드라마가 여성들이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가정 이야기나 사랑 내용을 소재로 삼는 데다 섬세한 심리묘사가 요구돼 여성들이 작가에 도전하고픈 생각을 갖게 만든다』
재택 작업이 가능한 근무환경과 높은 수입, 성차별이 없는 점, 전문직에 대한 사회적 평판 등 현실적인 요인이 더 크다는 분석도 있다. 가정과 일을 병행할 수 있고, 인기작가들의 작품 편당 수입이 억대를 훨씬 넘는 현실은 여성들에게 작가 입문을 유혹한다.
여성들의 자아실현과 문화표출 욕구도 작용한다. 방송작가교육원 수강생 강혜란(33)씨의 말. 『결혼해 아이와 남편 돌보면서 나의 존재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남들이 사치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 인생이나 주변 이야기를 극본으로 써보고 싶었다. 꼭 드라마화가 안돼도 좋다』
극작가는 일상이 없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극작가로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아는 것일까? SBS 주말극 「파도」 의 작가 김정수씨와 MBC 월·화 미니시리즈 「마지막 전쟁」 의 작가 박예랑씨의 일상.
김씨는 벌써 4개월째 현관 밖을 나선 적이 거의 없다. 아침 6시 기상, 30분간 신문읽기, 30분간 식사. 곧 바로 작업실로 쓰는 작은 방으로 직행. 점심을 간단히 빵으로 때운 뒤 집필 계속. 오후 8시 남편과 아이들 얼굴 한 번 보고 다음날 오전 1시까지 피말리는 작업은 계속된다. 가사는 엄두도 못내고 하루 평균 16시간 이상을 극본 쓰기에 매달린다. 기자가 찾아가겠다는 말에 『사람 형상이 아니라 귀신 몰골이어서 만나기 어렵다』며 거절하고는 『나는 일상이 없다』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스물여덟의 미혼 작가 박예랑씨. 데이트는 팔자 좋은 단어에 불과할 뿐. 새벽 5시에 잠들어 아침 8시에 일어난다는 그녀에게는 신문읽기, 식사, 이메일로 송고 하는 것 외에는 극본 쓰기가 일상의 전부다. 『처음 2주간은 시청률이 낮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작가 지망생들이 화려한 겉만 보고, 마감의 고통과 시청률 압박 등 이면의 모습은 살피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극작가들은 집필하지 않는 기간에도 일한다. 다음 작품을 위한 구상과 취재 그리고 자료수집 등으로 여전히 바쁘다. 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생각처럼 큰 돈을 벌지 못한다(관련기사 참고). 데뷔가 곧 탄탄대로를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한 방송사에서 드라마 작가로 이름을 떨치는 사람은 2~3년에 한 명 나오기 힘들 정도다.
지난달 막을 내린 SBS 「은실이」의 작가 이금림씨의 말. 『세월이 아이들을 길렀다. 여성으로서의 아기자기한 삶을 포기한다는 각오를 하지 않으면 극작가의 꿈을 이룰 수 없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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