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인(老詩人)은 막 간식의 식탁앞에 앉는 참이었다. 간식이란 매일 하오 3시면 위층의 거실에서 아래층의 부엌방으로 내려와 맥주를 마시는 일이다. 외출을 삼간지가 오래 되어 콧수염 턱수염이 텁수룩하다. 몸은 다소 야위어진 듯 하나 목소리는 정정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 찬 맥주는 건강에 안좋다고 식히지 않은 것을 세병이나 비운다.서울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마을의 낡은 단독주택 대문에는 「서정주」라고만 쓴 문패가 무명인처럼 붙었다. 문 앞의 소나무 한 그루는 시인이 29년 전 이집을 지어 이사오면서 기념식수를 한 것이다.
식탁에는 생마늘종이 안주로 나와 있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熊女)가 된 뒤 단군을 낳았는데, 시인의 집 옥호가 이 쑥과 마늘에서 딴 봉산산방(蓬蒜山房)이다. 생마늘종은 건강식이라 하여 시인의 끼니마다 상에 오른다.
이 미당(未堂)이 지난 7월1일(음력 5월18일) 84회 생신을 맞았다.
미당이란 아호는 광복되던 해 배상기라는 중앙고보 선배가 미래의 사람이란 뜻으로 지어준 것이라고 회상한다. 그 미래가 아직 80수(壽)밖에 되지 않았다.
시인은 시를 맨처음 만난 것이 어릴때 서당에서 배운 이백(李白)의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라면서 취흥에 읊조린다. 『아미산월이 반륜추하니(峨眉山月半輪秋)…』. 첫 시가 이렇게 평생 간다.
시인이 맨처음 쓴 시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달밤」이다. 담임이던 요시무라 아야코라는 일본인 여선생이 7·5조의 이 시를 극찬하여 귀여워해 주었다. 그때 30대이던 이 여선생이 첫사랑이었다면서 노시인은 아직도 못잊어한다.
8순의 시인이 앞으로 쓰고 싶은 시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한다. 평생을 태우고도 못다 지피는 것이 시인의 사랑인가. 『사랑이 깊어지면 종교가 되지』라고 말한다.
미당의 대표시 중의 하나인 「동천(冬天)」은 흔히 구도(求道)의 시로 풀이된다. 그러나 시인은 『그거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사랑의 시야』라고 잘라 자해(自解)한다. 시인이 사랑하던 한 여성의 눈썹을 맑은 하늘에 초승달처럼 모셨을 뿐이다.
미당에게 80평생을 바친 시란 한마디로 무엇일까. 『진실이지. 나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야』라고 대답한다. 공자의 「사무사(思無邪)」 한마디로 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머리만 있어서는 안되고 가슴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미당은 지금 심장의 표피가 마르는 병을 앓고 있다.
지금도 매일 세계의 높은 산 1,628개의 이름을 줄달아 소리내어 외우는 것이 건강법이다. 바이칼호의 수심이 1,742㎙라는 것까지 외울만큼 기억이 초롱초롱하다. 아직도 시작(詩作)의 손을 놓지 않고 있다.
만 84세라면 우리나라 문학인 중에서는 오래전부터 절필을 하고 있는 소설가 황순원씨와 동년생으로 그와 함께 최장수의 기록이다. 지금까지는 김동리씨가 83세 되는 해 타계한 것이 최장수였다.
세계적으로도 84세를 넘긴 문학인은 88세까지 산 토머스 하디와 85세에 죽은 헤르만 헤세정도다. 헤세는 만년의 일과가 홍수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독자들의 편지에 답장을 쓰는 일이었다.
우리 시단의 거목인 미당의 84세 생일은 병약한 노부인과 단둘이 마주 앉아 쓸쓸했다. 우리 문단의 희수(稀壽)를 맞은 대시인에게 나라에서도 국민들로부터도 아무 축의가 없었다. 그의 시에 몽리(蒙利)되지 않은 국민이 누구일 것인가. 그런데도 시인이 답장을 쓸 편지 한장 보내오는 독자가 없다.
노시인의 기식(氣息)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복이요 큰 위안이다. 미당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는 시인의 생가를 재건하고 기념관을 짓는 등 기념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기념이란 당자가 곁에 없는 것을 아쉬워하는 일이다. 본인이 생존해 있는 동안은 본인 자신이 기념물이다. 본인에게 절해야 한다.
미당은 곧 신병치료를 하러 영국의 에든버러로 떠난다. 아직도 우리는 민족의 유산으로 그의 시를 더 받아두어야 한다. 쾌유를 빌자.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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