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사회는 우상(偶像)을 만들어낸다. 우상은 대중을 매료시키는 특별한 사람이기에, 영화배우, 팝가수, 운동선수가 그 대상이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경탄해마지 않는 특별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숱한 화제를 꾸준히 뿌려야 한다. 이들이 대중의 욕망을 해갈해주지 못하면 우상의 자격을 잃는다.마릴린 먼로는 백치미의 섹스어필로 세계남성을 사로잡았고, 제임스 딘은 우수에 찬, 초점을 잃은 듯한 눈빛 하나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청년들에게 방황의 미학을 가르쳐 주었다. 영혼을 뒤흔드는 흑인음악에 투항해가는 백인들에게 자존심과 열광의 공간을 터 준 것은 록큰롤의 스타 엘비스였다. 이들은 감성과 욕망의 세계를 파고 든다.
이들의 목소리와 몸짓에는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이, 상식의 지루한 세계를 경멸하는 신선한 야성미가, 때로는 존재의 거추장스럼을 가볍게 만드는 마술적 요소가 배어 있다. 그것을 선사한 대가로 익명의 대중은 시대의 우상들에게 목적없는 열광과 사랑을 보낸다. 이 주고받는 과정에는 논리가 개입하지 않는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열광을 한 몸에 받는 절정의 순간에 대중의 곁을 떠날수록 그들은 영원한 우상으로 남는다. 드라마틱한 죽음일수록 좋다. 마릴린 먼로의 갑작스런 의문사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고, 제임스 딘은 파란색 스포츠카의 속도 속으로 사라졌으며, 엘비스는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
도시문명 속에서 시골정취를 노래한 컨츄리음악 황제 존 덴버는 비행기 추락으로 숨졌다. 안된 얘기지만, 그의 사망소식을 듣는 순간 어울리는 죽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의 방식까지 어떤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야 마는 운명적인 무엇이 느껴졌다고 할까.
영국에 다이애나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케네디 2세가 있었다. 케네디 2세의 죽음이 다이애나만큼 전 세계에 파문을 몰고온 것은 아니지만, 그가 미국인의 우상이 될 만한 요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왕실결핍증을 앓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의사(擬似)왕족의 왕자로 형상화되었다.
사회활동도 활발하여 40만부 판매고를 자랑하는 정치저널의 발행인이자, 뉴욕의 베스트드레서, 가장 섹시한 남자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그가 아버지처럼 비운에 간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대단히 불행하게도 신창원이 있다. 그는 영웅도, 우상도, 의적도 아니고 다만 강도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악한 죄인의 이미지가 희석되어 다가오는 것은 웬일인가? 케네디가 선망의 대상이라면, 신창원은 범죄욕구의 대리기사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공통점이 존재하지만 천당과 지옥만큼이나 격차가 있다.
그의 탈주 드라마에는 대중을 사로잡는 극적인 장면이 수없이 겹쳐진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탈옥이 실제로 발생해서 교도관들의 비행이 폭로되었다. 죄수의 입을 통하여 그들을 계도하는 간수가 고발된 것이다. 경찰의 추적을 조롱하듯 따돌리는 그의 민첩성과 능란한 변장술에서 권력에 대한 가벼운 복수전을 체험한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을 장식할 때 대중이 내뱉었던 「드디어」라는 감탄사 속에는 조금 아쉽다는 심정이 서려 있었을 터이다. 권력을 조롱하는 통쾌한 장면이 더 연출되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는 강남의 부자만 골라 털었다.
부자가 무슨 죄가 있으랴만, 치부를 부정부패로 이미 등식화한 대중에게 그의 행적은 짓궂은 위로였다. 신창원사건이 가져온 부정적 카타르시스, 거꾸로 된 세계에서 진리가 빚어나오는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죄인이 다스리는 자를 고발하는 이 거꾸로 된 세계에 대중이 매료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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