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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설의 한순간]18. 박범신의 「침묵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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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설의 한순간]18. 박범신의 「침묵의 집」

입력
1999.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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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침묵의 집」최근, 장편소설로 치면 8년만에 펴낸 신작 「침묵의 집」(문학동네 발행)은 어떤 평론가의 말을 빌어 요약하건대, 실존적 위기에 빠진 남녀가 걸어간 「일탈과 광기와 자멸의 여정을 정밀히 복원한」 소설이다.

그러나 모티프는 작고 가볍다. 삼십여 년 간 성장제일주의 관성을 따라 오직 달리듯 살아온 한 중년 남자가 출근길에 와이셔츠 소맷부리의 단추가, 늘어진 실밥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는 첫 장면이 그것이다. 여러 번의 세탁과정을 거치면서, 그 침식의 시간 때문에 실밥의 올이 풀렸다는 걸 인식하고부터 불현듯 삶의 정체성에 대한 통절한 질문들과 이 남자는 만나는 것이다. 그는 늘어진 단추를 통해 자신이 버렸던 「옛 꿈의 유령」들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는 한 여자로 상징되는 「유령」을 좇아 아프리카로, 북극해로, 카프카즈로, 중앙아시아로, 바이칼로, 극단적 파멸을 향한 죽음같은 유랑의 여정에 놓이게 된다.

어찌 내 주인공 뿐이겠는가.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알려진 수많은 중년 남자들이 지금, 늘어진 와이셔츠 단추처럼 달랑달랑, 알량한 기득권에 매달려 자기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당신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광적인 파멸로 갈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라고 묻는 독자들의 마음 속에도 정밀하게 들여다 보면 내 주인공의 「유랑」에 대한 욕구가 숨어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이 파멸이라고 부르는 삶을 나의 주인공 김진영은 「신생의 폭설같은 새 날들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침묵의 집」은 죽은 자의 집이 아니다. 와이셔츠 단추 하나로부터 출발해 지구의 반을 일상적 삶에 대한 처절한 반역의지로 유랑해 온 내 주인공을 통해 나는 우리들 사랑과 삶이 기실 얼마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침묵의 집」을 두고 「허깨비 같은 삶에 대한 반역의 기록」이라고 쓴 어떤 신문의 지적은 옳다. 가능하면 처절하고 끔찍하게, 해부학적으로 나는 쓰고 싶었으며, 그 기록의 최초 단서는 바로 실밥 늘어진 와이셔츠 단추 하나이다.

소설가 박범신씨는 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고, 소설 「불의 나라」 「풀잎처럼 눕다」 「숲은 잠들지 않는다」 등을 냈다.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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