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무수히 많은 글쓰기의 형태가 있음을 말해 무엇하랴. 아니, 그 이전에 숱한 글쓰기의 욕망이 이미 생겨나 있음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잉크를 펜촉에 묻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적던 시대에서부터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쓰는 것이 아니라 「쳐넣는」 시대까지 글쓰기의 역사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이런 점을 김영민은 펜 놀리기 시대에 비해 오늘의 자판 두드리기가 더욱 「탈재료적」이라고 재미있는 표현을 써서 설명한다. 글쓰기의 효율을 높이는 컴퓨터의 등장이 정신과 육체의 소모라는 원래의 글쓰기의 의미를 그저 손가락의 움직임 정도의 의미로 대체하고 있다는 진단인 것이다. 그것은 내용의 측면에도 작용하는데 글쓰기가 보편화, 대중화해가는 추이가 그 예증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인 두 개의 「손가락」의 의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영민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또는 비판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학제적이다」라는 것인데 그것의 대안이 바로 이 손가락이다. 이즈음 유행하는 몸의 담론을 빌릴 것도 없이 이 가벼운 육체성의 글쓰기는 엄숙성과 형식을 담지해야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논문의 교묘한 이데올로기를 무찌르는 항체이다. 이 책은 자신의 이같은 입론들을 우리 문학작품들 속으로 가져와 독특한 방식으로 독해하고 있는 글들의 모음이다.
이 활달한 글쓰기, 글읽기의 공간에는 이청준, 박완서, 김승희, 토마스 만 등이 종횡무진 등장한다. 근대성과 인문학의 문제들을 묘파하는 그의 거침없고 정치한 논리 속에는 우리가 원전들이라고 하는 것들 속에서 곤혹스럽게 느꼈던 바로 그 엄숙성과 딱딱함이 없다. 본인은 그런 점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않지만 우리 문학에 대한 애정이 아니면 잘 실현할 수 없는 경지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철학적 사유의 깊이와 함께 우리 문학의 현재에 대한 깊은 철학적 독법을 같이 볼 수 있다. 또한 나는 문학평론이라는 이름의 많은 서평이나 해설들에서 볼 수 있는 친절한 내용 요약이 없어서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다.
정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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