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현대사와 조봉암 노선」을 이야기하는 학술 모임이 열린 일이 있다. 죽산 조봉암의 탄생 100주년과 사형집행 40주년이 바로 올해이기도 하고, 전집출판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그날 토론에서 들은 이야기중의 하나다.망우리에 있는 죽산 묘소에는 앞면에 「죽산 조봉암선생지묘(竹山 曺奉岩先生之墓)」라 새긴 묘비가 있는데, 그 뒷면은 생몰연대도 행적도 없이 깨끗한 공백이라는 것이다. 『선생의 억울하고 기막힌 사연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에 그 공란은 우리들에게 선생의 신원을 하소연하고 있다』고 토론자로 참여한 전 언론인·정치인이며 호남대 교수인 남재희씨는 술회하였다.
공란은 그대로인 채, 최근에는 묘소입구에 어록비가 새로 섰다고 한다. 그 어록을 옮기면 이러하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돈이 준비되어 있어 했느냐. 독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했느냐. 독립운동을 하는 길 밖에 없어 한 것이 아니냐.』
죽산이 독립운동가였음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3·1운동 때의 1년 복역을 시작으로 그는 당당한 항일투사다.
이 어록이 특별히 우리의 가슴을 잡아당기는 까닭은 「독립운동을 하는 길밖에 없어」라고 하는 대목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길 밖에 없는」 대의(大義)이지, 수단이나 방법, 전망 같은 계산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산은 사형이 임박했을 때 「뉘우치는 성명」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감형해주겠다는 정부의 회유가 있었으나 끝내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살아서 죽느니보다 죽어서 사는」 대의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지금 죽산의 경우를 빌려 대의를 이야기하는 뜻은 그의 「법살」을 진상규명하자거나 신원을 탄원하자는 게 아니다. 요즘 하룻밤 자고나면 딴 얘기로 전개되는 우리 정치가 바로 그 대의라는 말을 먼저 생각나게 하는 때문이다.
내각제 논의가 유보됐든 내각제 개헌공약이 파기됐든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지』를 직접화법으로 설득하는 사람이 없음은 지난 대선에서 표찍어준 국민들에 대한 무례요 배반이다. 합당론이나 신당창당론도 그 어느 쪽으로 가든 그 당위성이 설명되어야 하고 그 논의가 공개되어야 하며 추진이 당당해야 한다. 밀실정치, 이합집산 따위의 구시대적 망령을 되살리는 식으로는 민심을 이끌어 낼 대의도 명분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논의구조를 향해서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다. 지난 시절 3당 통합의 재판이라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는 신당창당에서, 이런 세력 저런 인물들을 끌어모으는 정당이 지향하는 이념과 노선은 무엇이 될 것인가. 자칫 철새 정치인의 이합집산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밀레니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우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해명할 자신이 있는가.
마침 지난 16일 한국정치학회에 참석한 김종필총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공교롭지만 그도 「대의」를 말하고 있다.
『정치란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국민이 희망을 갖도록 돕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국가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지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IMF체제에서 초래된 빈부 양극화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 많은 국민들의 체감이고, 통계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양극화 문제 자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실은 서민들이 느끼는 위화감이고 박탈감이다. 재벌가문의 변칙 상속이나 고위공직자들의 부패, 도덕적 해이는 국민을 절망하게 하는 가장 큰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화제를 뿌린 도둑 신창원의 행적에서 드러났듯이 『털어도 소리나지 않는 동네』가 가장 위험한 우리 사회 병소(病巢)의 상징인지 모른다.
정치가 할 일은 이 병소에 더욱 다가가는 것이다. 합당은 않는다지만, 합당이든 신당이든 「대의」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보아도 당을 새로 만들고 짜고 하는 것이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국민이 희망을 갖도록 하는 일」과는 무관하게 진행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국민을 생각한다면 신당보다는 개혁이 먼저다. 역시 미진한 개혁, 그중에도 손도 대지 못한 정치 개혁을 그대로 둔채 새로운 정당살림을 늘리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야말로 「국가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는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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