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렛 팩커드의 신화를 다시 일군다. 세계 2위의 컴퓨터 업체인 휴렛 팩커드를 이끌 새 최고경영자(CEO)에 40대 여성이 올랐다. 휴렛 팩커드는 19일 현 최고경영자인 루이스 플랫의 후임에 루슨트 테커놀러지의 글로벌 서비스 담당 여성 중역인 칼리 피오리나(44·Carly S. Fiorina)를 임명했다. 여성이 다우존스 지수 산정에 포함되는 미 최우량 30대 기업의 최고 경영자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피오리나의 CEO 임명은 미 업계와 언론에서 놀랄만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기업 문화에서 최고 경영자 자리만큼은 아직도 성(性)에 대해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포천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중에 여성이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는 기업이 2개사에 불과하다. 더욱이 보수경영의 대명사인 휴렛 팩커드가 여성 CEO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놀라움은 더한 것 같다.
물론 피오리나의 뛰어난 경영능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됐다는 게 기업 분석가들의 평가다.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고, 메릴랜드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은 뒤 80년 미 최대 통신회사인 AT&T에 입사, 네트워크 시스템 사업을 담당했다. 96년 AT&T에서 루슨트 테크놀러지의 분사를 주도했던 그는 최근까지 이 회사에서 매출이 연 200억달러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하는 글로벌 서비스 분야를 이끌어 왔다.
피오리나의 CEO 임명 소식은 주식시장에 그대로 반영됐다. 휴렛 팩커드의 주가는 전날보다 2.25달러 상승한 반면, 루슨트 테크놀러지는 1.625달러가 하락했다.
휴렛 팩커드가 파격적으로 여성 CEO를 선택한 것은 보수적인 사내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창립한 지 60년이 지나 실리콘 밸리의 「할아버지」로 통하는 휴렛 팩커드는 최근 3년동안 월스트리트의 기대만큼 수익을 내지 못했으며, 인터넷 사업에선 선마이크로시스템스나 IBM에 뒤졌다.
휴렛 팩커드가 외부에서 최고경영자를 영입한 것도 처음이다. 물러나는 플랫사장은 『사내에도 걸출한 인재가 많지만 지금은 새로운 지도력이 필요한 때』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12월에 정식 취임하는 피오리나는 임명소식을 들은 뒤 『우리의 속도감과 긴장감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해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그리고 성문제에 대해서는 『기업은 성에 관계없이 가장 뛰어난 능력을 원한다』며 『내가 여성이란 사실은 흥미의 대상일지 몰라도 여기서 말할 주제는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권혁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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