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惡緣)」이다. 다가오는 4월 총선에서 패배하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대선 4수 끝에 얻은 대권을 사실상 잃고 만다. 다시 원점에서 과반수 국회의석을 긁어모으기에는 차기대선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고 정부출범 때부터 추진해온 사정으로 여야 사이에 생긴 「골」이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보복」 당한 야당이 보복할 차례가 될 것이다.영호남 갈등 사이에 끼어들어 줄타기로 2인자 역할을 차지해온 김종필(金鍾泌)총리는 더 위태로운 처지이다. 97년 대선 때 국민적 지지가 한 자릿수에 그쳤던 이가 그다. 그러한 김총리가 총선에서 패배하면 세대교체의 첫 타깃이 되어 충청권 내에서까지 밀릴 수 있다.
야당을 이끄는 이회창(李會昌)총재라고 처지가 다르지 않다. 그는 더 이상 국민을 열광시키던 「감사원장 이회창」이 아니다. 공동정부가 펼친 총풍(銃風)과 세풍(稅風)공세 탓에 지금은 상당히 지쳐 있다. 그의 주변에 있는 대다수 당권파마저 「이회창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총선에서 패배하면 아우성치는 비당권파에게 총재를 희생양으로 넘겨버리고 즉각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수많은 악연이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 공동정부는 총선이 다가오면서 야당을 궁지로 몰아넣는 수로 일관하기만 한다. 김총리는 공동정부 탈퇴라는 배수진까지 치고 내각제개헌을 연내에 추진한다더니 지금은 아무런 설명없이 그 대선공약을 포기하고 다시 밀실에서 김대통령과 권력분점방정식을 끌어내기 위한 담판에 나서고 있다.
대통령임기를 보장하는 대가로 총리위상과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이 모색되는가 하면 공천권에 대한 자민련의 몫을 늘리기 위한 흥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다 임창열(林昌烈)경기지사가 구속되면서 야당수뇌부는 한층 더 긴장감에 싸이고 있다.
검찰이 여권내 거물인사를 한 두명 더 구속해서 「명분」을 쌓은 뒤에 이회창총재를 주 타깃으로 삼는 세풍공세에 재차 나설 것이라는 음모설 때문이다. 김태원(金兌原) 전한나라당 재정국장이 검거되고 서상목(徐相穆)의원에 대한 소환이 다시 거론되고 있는 「정황」을 놓고 볼 때 DJP연대에 세풍을 가미시키면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공동정부가 생각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회창총재가 가만히 앉아 당할 리 만무하다. 대통령은 내각제공약으로 지난 대선 때 당선되었던 만큼 약속을 파기하는 경우에는 국민에게 재신임을 물어야 한다는 「국민투표론」을 제기하는가 하면 김종필명예총재는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탈퇴론」을 주창하고 있다. 게다가 검찰이 야당의 대선자금을 수사하면 여당 역시 비밀장부를 내놓고 특별검사로부터 조사받아야 한다는 「형평론」을 내놓고 있다.
이처럼 악연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사생결단을 내릴 한판 승부로 치닫는 정치권은 한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물고 늘어질 때 국민은 불신과 냉소감에 젖고 그 대가는 결국 여야 수뇌부가 치르고 만다. 그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국민은 공약파기에 대해 침묵하기만 한다. DJP 공약을 믿었을 만큼 어리석은 줄 알았느냐는 투다. 게다가 이회창총재가 내놓은 재신임론과 총리탈퇴론 및 대선자금수사론은 정치권 내에서나 「초강수」로 비추어진다. 국민은 그냥 무표정이다. 「남」의 일로 치부하고 있다.
여기서 정쟁의 수위가 조금만 더 높아지면 궁지에 몰린 이회창총재는 부산·경남권에 대한 공천지분을 매개로 하여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과 연대할 것이다. 전임 대통령으로서 확실한 「정보」를 가진 「물불 가리지 않는」 YS야말로 DJ의 맞수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지난 7일에 『삼성차 청산은 부산 죽이기』라고까지 주장하면서 반DJ 투사로 나선 상태이다. 역시 악연이다. 그리고 비극이자 희극이다.
/김병국·고려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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