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 총재 권한대행의 정치역정은 곡절이 많고 복합적이다. 여야와 이 당 저 당을 넘나든 그의 행보에는 파란만장하다는 표현과 함께 숱한 일화가 뒤 따른다.여기에는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성품과 행동력 있는 정의감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너무 튄다」고 지적하지만 적당히 살아가는 세태에서 드문 일 임에는 틀림없다.
이대행은 정치입문부터가 드라마틱하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최고회의를 출입하다가 박정희(朴正熙)의장의 눈에 거슬리는 기사를 써 필화로 구속되는가 했더니 이내 공화당 의원으로 변신, 박정희대통령의 측근이 된다.
공화당 소장의원때는 정풍(整風)운동을 주도해 김종필(金鍾泌) 당시 당의장과 껄끄러운 관계에 서게 된다. 그러다가 3선 개헌때 극렬히 저항, 박대통령의 미움을 사 어려움을 겪는다. 5공때는 국민당총재로 정치의 한모서리를 차지했고, 88년 92년 97년 대선때는 막후정치의 중요인물이 되기도 했다.
88년 대선때는 야당이면서도 노태우(盧泰愚)당시 민정당후보를 지원했고 92년 대선때는 김영삼(金泳三)후보 지명의 당위성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언했다. 97년 대선때는 젊은 후배 이인제(李仁濟)후보를 지원, 전국구 의원직을 버리고 국민신당에 합류했다.
문민정부때는 재산공개파동에서 낙마한 박준규(朴俊圭)국회의장의 후임을 맡았으나 날치기 사회를 거부, 여권의 미움을 샀다. 자유당 시절 일선기자때는 보안법파동을 취재석에서 지켜보다『자유당 이 ×들아』라고 소리쳤다가 곽상훈(郭尙勳)국회의장으로부터『이기자 조용히 하세요』라고 주의를 받아 이름이 속기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열혈 기질이 꼬인 정국을 푸는데 어떻게 작용할 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윤복(韓潤福·67 )씨와 1남3녀. 대구·67세 연세대 동아일보 기자 6, 7, 10( 공화당) 11, 12(국민당), 14(민자당), 15대(신한국당)의원 공화당 당무위원 한국국민당 총재 신한국당 대표서리 국민신당 총재 국민회의 상임고문
/고태성기자 tsko@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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