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특유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필체, 그리고 가공의 캐릭터가 빚어낼 수 있는 거침없는 이미지의 세계. 그 속에 성인만화가 자리잡아가고 있다. 만화는 더 이상 아이들과 청소년만의 문화가 아니다.성인만화를 관통하는 첫번째 주제는 성(性)이다. 성별(性別)로서의 성(gender)이 아니라 보다 직설적인 욕망과 관능적 이미지로서의 성(sex)이다. 기존의 인습적인 성과 성역할을 정조준하는 도발적인 소재들, 현대인의 성적 무의식을 지배하는 성적 코드들, 에로티시즘의 기표들로 가득하다.
성인만화의 탄생
70, 80년대는 성인만화의 암흑기였다. 심의와 검열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만화가는 아무도 없었다. 이른바 「건전·명랑만화」만이 허용되던 그 시절, 성인만화 작가들은 문화적 시민권을 얻지 못한 변방의 쓸쓸한 유민들이었다.
90년대 중반, 성담론의 부활과 함께 등장한 일련의 페미니즘·동성애 논쟁은 문학과 영화를 비롯, 만화계의 판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95년을 기점으로 「미스터 블루」 「투엔티 세븐」 「빅 점프」 등 본격 성인만화 잡지를 표방한 만화 전문지들이 창간 러시를 이루었다. 격주로 발행된 이들 잡지는 매번 15편 안팎의 물량을 채우기 위해 신인 작가를 필요로 했고, 수혈된 신인 작가들은 기존의 만화문법과는 다른 톡톡 튀는 상상력과 표현기법으로 응답했다.
이들 새로운 성인만화 작가군 속에 양영순(29·남)과 「누들누드」가 있었다. 95년 「미스터 블루」에 연재됐던 「누들누드」는 허를 찌르는 유쾌하고 기발한 성적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압도했다. 5권의 단행본으로 묶인 「누들누드」는 50만권의 놀라운 판매고를 올렸다. 98년 비디오로 출시되더니 8일 속편(관련기사 참조)이 출시됐다.
성인만화의 이미지들
95년 순정만화 잡지 「화이트」에 연재를 시작, 심의의 칼날을 끝내 피하지 못하고 97년 연재를 중단한 「열왕대전기」(이정애 작)는 그때까지도 「캔디」류를 벗어나지 못했던 순정만화에 동성애를 소재로 삼은 최초의 작품. 8등신 남자들 일색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혼동된 섹슈얼리티로 인해 흔들리는 동성애자들이다. 작가는 여성 또한 관음증적 시선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고, 이에 대해 여성 독자들은 팬클럽을 결성해 화답했다.
「열왕대전기」에서 시작한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은 「아프리카」(박희정) 「렛 다이」(원수연) 등 동성애를 보다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들과 「크레이지 러브 스토리」(이빈) 등 페미니즘적 시각의 작품 등으로 이어지면서 순정만화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당 34세, 대기업 선전과 과장」. 직장 남성들에게 인기인 번역 일본만화 「시마 과장」(히로카네 겐시)의 주인공 시마 코우사꾸의 이력은 이렇듯 평범하다. 시마 과장은 같은 사무실 여직원과 외도를 하는 순간에도 승진에 지장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불륜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의 정력과 성적 테크닉에 대해 끊임없이 조바심을 낸다. 출세욕과 은밀한 성적 욕망, 그리고 그것에서 말미암은 번민과 스트레스의 연속.
「시마과장」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성적 억압과 만난다.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면서도 늘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씁쓸한 자신을 새삼 확인한다. 「맞아, 이 자도 별 수 없군」 하며 슬며시 쓴 웃음을 피워올리게 하는 힘, 「시마 과장」은 문학 못지 않게 만화 또한 「리얼리즘의 승리」를 성취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외설인가, 주변 문화인가?
「누들누드 2」의 출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한 켠에서, 국내 유일의 성인용 만화전문지였던 「빅점프」는 최근 「청소년도 볼 수 있는 만화잡지」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18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빨간 딱지를 붙이고서는 도저히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심의와 규제의 그림자는 여전히 성인만화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누들누드」가 수십만권씩 팔려나갔음에도 성인만화에 대한 사회적 잣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외설인가, 변방의 문화인가? 그것은 문학에서의 논란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성역의 파괴, 인간의 성적 심리에 대한 묘파(描破), 사회적 금기에 대한 조롱 등 실험성의 뒤편에는 음담패설과 성감대를 무기로 내세운 상술도 혼재한다.
성인만화계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들의 책임 못지 않게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비디오 가게에 널린 포르노 테이프는 스스럼 없이 빌려 보면서, 성인만화라면 고개를 외로 꼬는 이중잣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성인만화의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만화 전문지 「부킹」 박성식 팀장의 말.
/황동일 기자 dongi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