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선생이 1913년 설립한 이후 그동안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왔다. 도산 스스로 설립목적을 『민족전도 대업의 기초준비』라고 밝혔듯이 흥사단은 당장의 정치적 필요에 함몰되기 보다는 인격수양과 실력양성에 비중을 두었다. 이로 인해 때때로 『싸움을 회피하는 준비론』이라는 비판도 들었지만 인재 양성의 산실로 뚜렷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흥사단의 변치않는 생명력은 시대적 요구를 끊임없이 반영한데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운동단체로서 지도자 양성에 주력했다. 당시 흥사단은 샌프란시스코에 본부,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上海)에 원동위원부가 있었는데 본부는 재미동포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임정에 전달하는 역할에 주력했고 원동위원부는 임정에 직접 참여,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샌프란시스코 본부는 당시 유학생으로 흥사단 8도대표의 한 사람이었고 자유당정권시절 야당의 대통령후보가 됐던 조병옥(趙炳玉)씨, 상하이 원동위원회는 평단원인 이광수(李光洙) 주요한(朱耀翰·이상 작고) 두 시인이 이끌었다.
48년 본부를 서울 명동으로 옮긴 흥사단은 국민계몽운동단체로 탈바꿈한다. 질서의식을 강조한 120개조 수칙을 만들어 매달 10개조 실천운동을 벌였고 54년에는 현재도 매주 개최되는 금요개척자강좌를 시작했다. 당시 국어학자 김윤경(金允經), 서울대 초대총장이었던 장리욱(張利郁), 미군정청 노동부장관이었고 나중에 건국대 총장을 지낸 이대위(李大偉·이상 작고), 대한적십자사에서 활동하던 서영훈(徐英勳)씨 등이 평단원으로 활약했다. 63년부터는 『의식개혁을 위해서는 청소년때부터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요한 이사장의 지론에 따라 초·중·고교와 대학에 흥사단아카데미 조직을 만든다. 숭실대 철학과 교수였던 안병욱(安秉煜)씨와 서울대 공대교수였던 우형주(禹亨疇)씨 등 두 단원이 각급학교를 찾아다니면서 도산사상 전파에 힘을 쏟았다.
77년 지금의 대학로 건물로 이사를 하면서 흥사단은 민주주의단체로 다시 변모했다. 흥사단아카데미를 통해 양성된 젊은 인재들이 흥사단 외부에서 『민주주의 없이는 국가발전도 없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독재투쟁에 나섰다. 이태복(李泰馥)노동자신문 발행인과 강삼재(姜三載)한나라당 의원은 당시 국민대와 경희대의 아카데미조직을 기반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부산대 아카데미 소속의 김종세(金鍾世)글샘미디어 대표는 79년 부마항쟁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흥사단도 이같은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84, 85년 시국성명을 발표한다. 또 김병우(金炳佑·옥천중 교사)전교조 충북지부장 등 흥사단의 교원조직을 이끌던 386세대는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다.
90년대 들어 흥사단은 YMCA, 경실련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시민운동단체로의 전환은 박성규(朴聖圭)사무총장, 박인주(朴仁周·월드워치 대표)시민실천위원장, 김재실(金在實·산업은행 이사) 김소선(金昭先·대한매일신문사 총무국장)씨 등에 의해 추진됐다. 아카데미 1세대인 이들은 93~95년 흥사단 공의회장을 지낸 서영훈씨와 60년대초 아카데미 전신인 대학생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김종림(金鍾林)전이사장, 이대형(李大亨)현이사장의 후원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손봉호(孫鳳鎬)서울대 교수와 통일원장관을 지낸 홍성철(洪性澈)씨가 합류, 시민운동의 이론정립에 노력하고 있다. /이은호기자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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