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설은 영 재미없어서 못읽겠다는 사람, 허구헌날 아파트 주변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신변잡사나 토로하는 소설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는 독자들, 도대체 소설에 지금 현재의 이야기는 안보이고 옛날타령밖에는 없다고 불만인 이들. 그런 사람들은 김영하(31)씨의 소설을 한 번 읽어보자.김씨가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문학과지성사 발행)를 냈다.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96년)와 첫 작품집 「호출」(97년)을 냈고, 올해 현대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으로부터도 공인받아 90년대말 한국문학의 「비상구」로 떠오른 김씨의 두번째 작품집이다.
우리 작가 중 드물게 직접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그의 홈페이지에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씌어져있다. 「모든 사물의 틈새에는 그것을 부술 씨앗이 자라고 있다네」. 그의 소설은 그 씨앗처럼 파괴적이다. 『어디로든 가요, 전 괜찮아요, 어디든 여기보다야 낫겠지요』 작품집에 실린 단편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에 나오는 말처럼 그는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를 「다른 세상」으로 데리고 간다.
그 다른 세상은 어디인가. 다른 곳 아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90년대말의 현실이다. 끊임없이 새롭지 않으면 가차없이 폐기되어버리고 마는 「눈(眼)의 문화」, 이미지와 영상문화의 시대에 그는 문자라는 진부한 형식으로 대결을 벌인다. 그 대결은 치열한만큼 그가 드러내는 현실은 강렬하다. 그러나 그가 이 현실의 이야기에서 제시하는 것은 그 근저와 너머에 있는 다른 순간이다. 「어느날 갑자기, 진짜가 찾아옵니다. 그때, 아주 잠깐, 다른 세상, 다른 나를 보는 겁니다. 나는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됩니다」(「피뢰침」에서).
사진관의 여주인에게 어느날부터인가 한 남자가 이상한 필름을 맡긴다. 몇 롤의 평범한 가족·풍경사진들 중에서 한 롤 필름 중 단 한 컷씩에만 인체의 한 부분이 찍혀있다. 처음에는 발이었다. 다음에는 무릎, 배꼽, 엉덩이…. 사진관의 남자주인이 살해되고, 수사가 진행되지만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김씨의 단편 「사진관 살인사건」의 줄거리다. 표제작 「엘리베이터에 낀 …」은 한 평범한 샐러리맨이 겪는 황당한 하루를 유머러스하게 그린 소설이다.
출근을 서두르던 주인공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한 사람이 끼어있는 것을 보지만 회사 회의시간에 맞추기 위해 119 신고도 못하고 버스를 탄다. 버스마저 사고를 당하고, 주위사람들에게 휴대폰을 빌려 신고하려 하지만 그들이 휴대폰을 빌려줄 리 만무하다. 모든 일이 뒤틀려가는 하루, 결국 주인공 자신마저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만다.
심각한 사유는 당초부터 배제한 속도감 넘치는 단문으로 끌어가는 그의 문장은 우리가 사는 사이버시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러면서도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신화의 인용에서 드러나듯 고전적 감각도 잃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 늘 깔려있는 에로티시즘과 죽음의 모티프도 독자를 흡인하는 요인. 이런 여러 요소들로 그는 「우리나라 문학의 주류인 샤머니즘 체질에서 비로소 벗어난 작가」(문학평론가 김윤식)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김씨는 『읽는 자들의 기관지로 빨려들어가 그들의 기도와 폐와 뇌에 달라붙어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호흡을 곤란하게 하며 다소는 몽롱하게 만든 후, 탈색된 채로 뱉어져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그런 담배 같이 독한 소설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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