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7월의 독립운동가로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선생을 선정해 갖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한글을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시대에 한글연구와 보급운동에 일생을 바친 선구자의 공로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독립신문 회계겸 교보원으로 일하던 1896년 5월 그가 조직한 국문동식회는 뒷날 한글학회의 초석이 되었고, 최초의 국어문법 교본인 「대한국어문법」은 나라글을 널리 씨뿌린 국민교과서였다.■그러나 그가 한글전용과 띄어쓰기 실천의 개조(開祖)였다는 보훈처의 발표에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 보훈처 보도자료에는 그가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면서 자주적으로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실천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일부 국어학자들은 이 통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기문 전 서울대 교수는 독립신문이 서재필박사 주도로 창간됐고, 최초의 한글전용 공문서인 창간호 사설을 쓴 사람도 서박사였다고 주장한다.
■독립신문 창간사설은 50% 이상이 한글전용과 띄어쓰기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 한글전용의 이유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 띄어씌기의 필요성이다. 주시경선생은 독립신문 창간 보름 전 서박사를 처음 만났고, 당시 그는 배재학당 학생 신분으로 사설의 내용과 형식에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창간사설이 서재필박사 작품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이교수의 주장이다.
■이교수는 뒷날 주시경선생 저서의 내용을 이런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1906년에 나온 대한국어문법 서문이 국한문혼용이었고 1914년에 나온 저서에도 띄어쓰기가 제대로 돼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신문에는 광고까지도 철저히 한글 뿐이었음을 들어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는 서박사의 확고한 철학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일부 국어학자의 소수의견일 뿐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국학의 뿌리를 밝히는 본격적인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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