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사생아로 태어났던 삼성자동차가 처리의 가닥을 잡았다. 이건희회장이 2조8,000억원 규모의 사재를 출연해 부실채권을 해소하고 법정관리로 넘긴후 제3자 매각을 한다는 것이다. 애초 삼성자동차의 출발은 경제적 타당성을 결여한 것이었다.당시 전문연구기관은 물론 담당 정부부처도 시장과 기술여건상 삼성자동차는 승산이 없는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삼성의 끈질긴 로비에 밀려 급기야 정치적 결탁이 이루어지고 불허가 인가로 바뀌었다. 이와 같이 불합리하게 태어난 삼성자동차가 경영이 부실해지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삼성자동차의 부실이 한 기업의 부실로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삼성그룹 전체에 타격을 주고 더 나아가 기아자동차의 경영기반을 흔들어 경제위기를 불러온 단초를 제공했다.
이건희회장이 사재를 출연해서 삼성자동차를 처리한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진다는 차원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처리방식이 또 다른 속임수의 성격을 갖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이번 조치로 삼성그룹은 골칫덩어리인 자동차를 처분하고 삼성생명의 상장이라는 숙원을 풀어 일거양득의 쾌거를 이루었다. 삼성자동차의 처리방안은 삼성생명 고객의 돈으로 삼성자동차의 빚도 갚고 폭리도 취하는 제2의 반사회적 비리이다.
삼성측은 2조8,000억원의 이회장 사재를 출연하면서 정부의 상장허용을 전제로 액면가 5,000원짜리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를 주당 70만원에 평가했다. 문제는 상장이 허용돼 주가가 70만원이 되면 이회장의 나머지 지분 112만주의 가격이 8,000억원 가까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회장은 삼성자동차의 부채를 갚고도 투자원금 200억원의 40배나 되는 이득을 얻는 셈이다.
삼성생명의 상장에서 오는 이득은 이회장 개인에 지나치지 않는다. 삼성생명에 대한 이회장 일가의 모든 지분을 고려할 때 총 7조원에 이르는 반사이익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생명보험회사의 재산은 주주의 것만이 아니다.
재산자체가 보험가입자들이 만약을 대비해 지급한 보험금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하는 이득에 대해 가입자들도 당연히 귀속권이 있다. 외국의 경우 생명보험회사들은 가입자들을 주주로 참여시켜 자산운용에 따른 자본이익을 골고루 나눠갖는 상호회사 형태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견지에서 삼성생명이 상장할 때 발생하는 이익을 당연히 보험가입자들과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이회장이 삼성자동차에 대해 제대로 책임을 진다면 삼성생명의 상장을 일단 유보하고 순수한 개인재산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에는 이회장 개인이 소유한 에버랜드나 삼성전자 등 상장회사의 지분이 포함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회장은 경제위기를 초래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과감한 재벌구조개혁에 솔선수범을 보이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번 삼성자동차 처리의 속임수는 삼성과 정부의 공동작품이라는 데 더욱 문제가 있다. 삼성생명의 상장을 전제로 한 이회장의 사재출연은 정부와 삼성그룹 상층부 사이에서 극비리에 마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사실상 재벌개혁이 아니라 재벌특혜를 밀실에서 흥정한 과거의 정경유착 관행을 답습한 것이다.
삼성자동차 처리방안은 정부가 재벌개혁의 핵심과제로 추진해온 빅딜정책이 사실상 유명무실화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번 조치로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와의 맞교환은 상장이라는 특혜를 주는 것으로 변질되어 물건너 가고 실제로 양사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막막한 상태이다.
또 빅딜의 표본처럼 여겨졌던 현대전자의 LG반도체 인수는 데이콤을 LG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특혜의 잔치로 끝났다. IMF 위기를 온갖 국민의 고통으로 겨우 이겨낸 우리경제는 정부와 재벌이 벌이고 있는 특혜게임에 언제 수렁으로 빠질지 모르는 또 다른 위기에 처해 있다. 정부와 재벌은 깊은 반성과 함께 새로운 개혁의 청사진을 시급히 내놓아야 한다.
/이필상·고려대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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