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생태사상박희병 지음
돌베개, 384쪽, 1만 5,000원
「실옹(實翁)이 말했다. 『생물에 세 가지가 있거늘, 인간, 금수, 초목이다. 이 셋에 귀천의 등급이 있느냐?』 허자(虛子)가 대답했다. 『천지간 생물 중에 오직 인간이 귀합니다. 금수한테는 지혜가 없고 초목한테는 감각이 없으니까요. 또 이들에게는 예의가 없습니다』 실옹은 고개를 들어 껄껄 웃더니 말했다. 『너는 정말 인간이로구나! 오륜(五倫)과 오사(五事)가 인간의 예의라면, 무리지어 다니면서 함께 먹이를 먹는 건 금수의 예의고 군락을 지어 가지를 뻗는 건 초목의 예의다. 인간의 입장에서 물(物)을 보면 인간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면 물이 귀하고 인간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물은 균등하다』」(홍대용의 「의산문답」중)
생태학은 심각해져 가는 환경문제를 극복하려는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지적 탐구의 하나에 틀림 없다. 서구 지성들은 70년대부터 물질문명이 낳은 환경파괴의 문화를 극복하는데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의 환경운동도 이런 서구의 생태학적 사유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면 우리의 전통사상에는 생태에 관한 사유가 없는 걸까? 서양의 환경철학만이 대안의 문화, 공생의 문화를 찾는 가장 적절한 답일까?
서울대 국문학과 박희병 교수가 쓴 「한국의 생태사상」은 우리 전통사상에 담긴 생태적 지혜를 탐구한 책이다. 이규보, 서경덕, 김시습, 신흠, 홍대용, 박지원. 고려 중기인 12세기 말부터 조선 후기(18세기)까지 당대의 일급 사상가면서 뛰어난 자연철학의 사유를 보여준 인물들. 사람은 무엇이고, 사람 아닌 다른 짐승이나 벌레처럼 하잘 것 없는 동물 또는 식물과 어떻게 다른가, 사람살이란 어떤 태도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 문인들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은 인간과 다른 생물의 새로운 윤리를 찾았다. 사람과 물(物)이 근본에서 다를 게 없다는 「인물균(人物均)」의 사상. 나아가 그는 사람과 사람, 중국과 오랑캐 사이에도 차별을 뛰어 넘어 개별적 존재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홍대용은 사회와 민족을 보는 새로운 눈을 「인물균」이라는 생태적 관점에서 열었다는데 주목할 수 있다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박지원은 생명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 사람살이의 방식이라든가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생태주의적 성찰을 보여준다. 핵심은 명심(冥心). 외물(外物)과 내아(內我)의 구분이 사라지고 통일된 마음 상태, 감각의 인식을 넘어선 주객합일의 경지. 따라서 명심은 존재의 차별, 가치의 위계를 뛰어 넘는다. 이밖에 만물이 근원에서 하나라는 만물일류(萬物一類) 사상(이규보), 삶과 죽음에 대한 자연철학적 성찰(서경덕), 생태계를 장엄한 생명의 장, 조화와 공생의 장으로 이해(김시습)하고, 학문이 단순한 지식 추구여서는 안되며 생(生)과 세계에 대한 정신적 깨달음과 연결되어야 한다(신흠) 등도 모두 독창적인 생태주의 사상들이다. 지금은 물론 다음 세기 문화의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과연 어떤 사유의 힘에 기대어야 할지 곰곰히 생각하게 만들고,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