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아무리 큰 사건이 벌어져 여론이 들끓어도 즉응(卽應)식으로 대처하지 않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명분과 논리를 갖춰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를 항공모함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양에서 항공모함이 방향을 바꿀 때 반경을 크게 잡아 천천히 선회하는 모양에 비유한 것이다. 깜짝쇼 방식으로 국민을 경기들게 했던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스타일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5·24 개각직후부터 꼬박 한 달동안 이어지고 있는 난국의 수습 과정은 김대통령의 항공모함 스타일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현 위기상황의 출발점은 5·24개각 직후 터져나온 옷로비의혹이라고 할 수 있다. 의혹이 제기되자 야당은 김대통령의 사과와 함께 김장관의 경질을 강력히 요구했고 여론도 들끓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당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전장관은 「법대로」논리로 보호했다. 여론 차단 문제는 참모진들이 일축해 버렸다. 대국민 사과 문제는 국무회의 석상에서의 유감 표시로 지나갔다. 이런 와중에도 측근들은 『김대통령은 모든 걸 알고 있다』 『시간을 갖고 지켜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측근들의 「예언」은 8일 처음으로 현실화했다. 검찰 파업유도 의혹이 터져 나오자 김대통령은 김전법무장관을 기다렸다는 듯이 해임했다. 옷로비 파문이 터지고 난 뒤 2주일만의 결정이었다. 이는 「DJ항모」가 본격적으로 민심의 방향으로 선수를 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21일에는 민정수석실 신설방침이 결정됐다. 『대통령의 귀와 눈을 열라』는 여론이 한달만에 끌어 낸 성과다.
「DJ항모」의 행로는 25일 절절한 어구의 대국민 사과와 「국민을 하늘로 여기는 정치론 천명」으로 이어졌다. 물론 여기에는 손숙(孫淑)전환경부장관의 격려금 수수 파문 등 돌출 변수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옷로비사건직후의 『민심을 외면한다』는 비판론이 가장 큰 계기가 됐으리라는데 이론이 없다.
DJ의 항모형 의사결정방식은 검찰의 파업유도 의혹 대처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특검제도입불가입장이던 김대통령은 특검제도입 요구가 빗발친 뒤 1주일이 지나고서야 제한적 수용쪽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손전장관을 사건 보도 다음날 바로 경질한 것, 파업유도 국정조사를 의혹제기후 하루만에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조치들도 옷로비사건 수습에 대한 장고(長考)의 부산물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이같은 「지구전(持久戰)」식 정국운영은 논리와 명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또 여론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카드를 공개함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한편으로 야당의 김을 빼버리는 전술적 노련함도 엿보인다.
이제 정가의 관심은 「DJ항모」의 다음 행로에 쏠려있다. 전면적 특검제도입 여부, 국민회의의 8월 전대를 계기로 한 청와대 비서실 개편 여부, 권력핵심부의 도덕적 자기 검증과 그에 뒤이은 읍참마속 가능성 등이 모두 거론된다.
/신효섭기자 h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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