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은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 50주기. 백범의 비서였던 김우전(金祐銓·77)광복군동지회 회장은 『선생께서 안두희(安斗熙) 흉탄에 가시지 않았다면 분단이 지금까지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김회장은 일본 교토(京都)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재학중 학병으로 끌려갔다 탈출, 광복군 제3지대와 미군OSS(CIA전신)중국본부에서 활약하다가 45년 4월부터 49년 6월26일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비서로 일했다.
48년 4월20일 백범이 남북협상을 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갈때도 수행한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선생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것 같아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백범이 붓으로 즐겨썼던 서산대사의 시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가는 길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과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면서 국민에게 밝힌 『마음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 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말은 지금도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남북협상을 통한 연립정부안을 구상한 선생의 통일론을 지금도 현실성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 안타깝다』는 그는 『선생의 통일론이야말로 민족을 하나로 묶을 유일한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광복회 일에 관여하기 시작한 80년대 초반부터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강연에 열중해왔다. 그가 강연을 했던 학교만도 줄잡아 300여곳에 이른다. 그런 그에게 요즘 학교교육은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 독립애국정신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21세기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독립애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광복군 시절과 김구선생을 모신 이야기 등을 묶어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희수(喜壽)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년같은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는 『김구선생이 애타게 소원했던 남북통일이 빨리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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