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일방적이었다. 「침공」 아니면 「융단폭격」이란 표현이 붙어다녔다. 여름만 되면 태풍처럼 밀려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흥행성 대작)들의 기세. 피하는게 상책이라 여겼다. 그러나 올 여름은 분명 다르다. 『할리우드 나와라, 한번 붙어보자』는 분위기다.할리우드의 공습과 한국형 블록버스터
무모한 짓이 아니다. 조잡한 티라노(심형래의 「티라노의 발톱」)로 스필버그의 공룡(「주라기 공원」)에 맞섰던 93년 여름의 코미디도 아니다. 비록 할리우드의 100분의 1에도 못미치지만 20억원이 넘는 제작비, 과거에는 할리우드 전유물로 생각했던 소재들의 선택, 최고 스타들의 기용.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다. 이같은 유사 할리우드 스타일의 「맞불 작전」은 이미 「쉬리」가 「타이타닉」을 무너뜨림으로써 그 위력을 입증했다. 12일 나란히 개봉한 김동빈 감독의 공포물 「링」(서울 20만명)은 「양들의 침묵」까지 팔고 나온 앤서니 홉킨스의 「인스팅트」(서울 5만명)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할리우드의 본격 공습은 26일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에피소드1」로 시작된다. 제다이 기사 오비완(이완 맥그리거)의 첨단 광선검에 100년전 제주 천민 출신의 민란 장두(장수) 이재수(이정재)가 장도를 들고 맞선다. 32억원을 들였다고 하지만, 성격이나 규모와 전략(오락성)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것같은 싸움.
애국심과 스크린쿼터
그러나 승패는 영화 자체에만 있지 않은 법. 사회적 분위기와 관객심리도 중요한 열쇠. 「쉬리」는 「타이타닉」의 기록을 깨야 한다는 영화대중의 「애국적」 분위기에 힘입었다. 삭발을 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스크린 쿼터 사수를 외치는 영화인들을 보며 국민들은 지금 우리 영화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 『미국 관객의 난리법석에 덩달아 춤을 출 이유가 없다』고 얘기한다. 지난 여름 「고질라」는 예상 목표(서울 80만명)의 절반 밖에 채우지 못했다. 분위기는 이렇게 무섭다. 올 여름 한국영화가 또 한번 그 등을 탔다.
이재수의 난 vs 스타워즈, 그 문화적 상징
전혀 상대가 안되는, 다른 자리에 서있는 영화다. 1,900여 컷의 특수효과와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한 세계적 오락상품 대(對) 99% 야외촬영에 자연광. 미래 가상우주공간 대 100년 전 제주도의 한 변방. 넋을 빼는 빠른 화면과 「벤허」 「클레오파트라」 등 온갖 아이디어를 범벅한 볼거리 대 색채와 구도의 결합으로 상징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박광수 감독의 작가주의. 미국식 철저한 영웅주의 대 민중적 반영웅주의.
유일한 공통점은 「전투」. 그것이 스크린쿼터 문제와 결합하면서 두 영화는 서로 적이 됐다. 공교롭게도 「스타 워즈」는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미국의 해외영화시장 개방압력의 상징이고, 제다이의 전사는 그것을 지키는 전사가 됐다. 그것에 대한 저항과 희생을 「이재수의 난」은 절묘한 시점에 역사를 통해 보여주는 셈이다. 관객들은 외세의 횡포를 미국의 문화식민지화 시도, 이에 대항하는 민란을 스크린 쿼터 지키기 운동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역사로 현실을 본다』는 감독의 의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셈이다.
「용가리」냐, 「타잔」이냐
한국 SF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자신하는 「신지식인」 심형래와 애니메이션 역사를 새로 썼다는 월트디즈니. 첨단 테크놀로지의 대결이다. 어린이를 겨냥한 것도 공통점. 「라이온 킹」과 「인어공주」의 애니메이터 케빈 리마와 크리스 벅이 공동 감독한 「타잔」은 에드가 라이스 버로의 고전이 원작이다. 이전의 실사영화나 TV물과 달리 빠르고 호쾌하다. 반면 「뮬란」 외에는 정서적 이질감으로 디즈니 창작 애니메이션이 국내 흥행에 부진했고, 아이들에게는 「타잔」에 대한 향수가 없다는 약점도 있다.
한국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인 100억원을 투입한 「용가리」는 할리우드 수준을 능가하는 특수효과를 내세운다. 문제는 그것을 이어주는 드라마 부분의 완성도. 세계시장을 겨냥해 미국배우 기용, 영어대사를 선택한 것도 국내 흥행의 변수. 그러나 지금까지 「용가리」만큼 홍보가 잘 된 영화가 없고, 아이들은 『재미없다』고 해도, 마음 먹으면 꼭 본다는 속성을 감안하면 「용가리」 열풍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다. 더구나 일주일 먼저 개봉하는,「인디아나 존스」 냄새가 나는, 미이라 부활의 공포와 모험을 그린 「미이라」(감독 스티븐 소머즈)는 어린이 관람 불가이므로 덕을 볼 수도 있다.
인정 사정 볼 것 없다 vs 형사 가제트
진흙탕 속을 뒹구는 형사와 사이보그 형사의 대결. 동화와 환상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이 이번에는 「철저한 리얼리즘」으로 돌아섰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우직한 형사(박중훈)가 영악한 범인(안성기)을 잡는 생생하고 된장냄새나는 우리의 현실 속 풍경. 애니메이션을 실사영화화한 「형사 가제트」(감독 데이비드 켈로그)는 상상의 시각화다. 1만 4,000개의 장비를 장착하고 맥가이버의 기술을 능가하는 사이보그 가제트 형사가 기발한 재주로 악당을 물리친다는 단조로운 줄거리의 영화.
유령, 자귀모 vs 유니버설 솔저2, 장군의 딸
108회 촬영, 촬영기간 9개월, 제작비 23억원, 최초 잠수함 미니어처 촬영. 「유령」 (감독 민병천)의 이력서다. 「자귀모」 (감독 이광훈)도 이에 못지않다. 제작비 25억원, 80회 촬영, 20분이나 되는 컴퓨터그래픽. 할리우드의 「크림슨 타이드」를 연상시키는 「유령」은 『우리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핵무기와 잠수함이란 폐쇄공간이 주는 긴장감만 있다면 B급액션 배우 장 클로드 반담의 「유니버설 솔저2」의 기세를 꺾을 수 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성폭행당한 딸이 출세를 위해 그 사실을 숨기려는 장군인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장군의 딸」(감독 마이클 베이)보다는 우리 귀신들인 「자귀모」의 재치와 휴머니즘을 관객들이 선택하지 않을까.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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