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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왜 소설가들은 여행을 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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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왜 소설가들은 여행을 떠나는가

입력
1999.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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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고장 그리스 인근을 6개월 가량 여행하면서 무려 50권의 책을 쓸 계획을 세운 이윤기(52)씨, 유럽 각지의 개인미술관들을 두 달여 기행할 생각인 김영하(31)씨. 그리고 살던 집까지 처분해 2년간의 해외방랑길에 투자한 김형경(39)씨. 2년째 인도네시아에 머물며 삶 자체를 새로 가꾸고 있는 이혜경(39)씨, 전업작가로서의 재충전을 위해 3개월간의 미국여행길에 나선 은희경(40)씨. 소설가들은 왜 먼 길을 떠나는가.여행은 누구에게나 기왕의 삶으로부터의 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로의 입구이다. 제대로 된 여행은 스스로를 완전히 없애는 경험과 함께, 전혀 다른 시선에서 생을 보게 하는 시선을 준다. 문단에서도 손꼽히는 여행광들인 작가이자 번역가 이윤기씨와 젊은 소설가 김영하씨가 모처럼 만나 작가의 여행의 의미와 서로가 꾸리고 있는 여장의 목록을 털어놓았다.

이윤기의 신화여행

이씨는 『교육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여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는 「희랍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을 인용했다. 『그래도 배워서 써먹을 수 있는 몇 안되는 행위의 하나가 여행 아닌가?』 이씨의 말에 김영하씨는 『작가에게 여행은 생활필수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씨는 26일께 미국으로 출발해 자신이 탐구하고자 하는 「그리스의 앞얼굴」인 로마, 「뒤얼굴」인 이집트를 거쳐 크레타 섬으로 들어가 6개월간의 「신화(神話)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200여권의 번역서를 냈고, 최근 창간된 번역전문지 「미메시스」의 조사에서 한국 최고의 번역가로 꼽히기도 한 그가 74년 이후 25년여 천착해 온 신화에 대한 공부를 정리하는 여정이다. 신화연구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볼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등은 그가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번역목록이다.

『신화는 그 문화의 본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지. 서양문화의 옛 얼굴을 보는 것은 곧 당시의 세계의 얼굴을 보겠다는 것이기도 하고.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어떻게 얽혀있나 하는 것을 탐구할 기회도 가졌으면 해』 이씨는 어린이들에게 신화의 세계를 알기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세계신화 서적 10여권, 수사학의 발달과정을 보여주는 영웅전 10여권, 「일리아드」 「오딧세이」와 헤로도투스 등의 고전 10여권 등 이번 여행에서 새로 번역할 책이 50여권은 족히 된다고 말했다. 그가 여행을 위해 준비한 목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30㎏에 달하는 카메라 장비. 그냥 눈으로 보고 지나치는 여행길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떠나보지 않고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익살에 따르면 『마스크 끼고 키스하는 꼴』이다.

김영하의 미술여행

김영하씨는 올 9월 유럽미술관 기행에 이어 내년에 200만원 정도 비용으로 세계일주 여행에 나설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그는 『마치 가전제품을 사듯 신용카드 할부로 비행기삯을 결제하면 사실 여행은 돈 쓰고 다니는 일이 아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배낭여행족이다. 『여행만은 미화(美化)될 수 있다』는 김씨는 실제 재작년 터키를 20여일간 60만원의 돈으로 여행하기도 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김씨는 이번 여행을 위해 연세대 한국어학당 강사 일도 무기한 휴직했다. 그가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늘 대할 수 있었던 것이 같은 현상을 놓고서도 각자의 문화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는 「타자(他者)의 눈」. 자신의 여행길도 그 눈을 틔우기 위한 것이다. 미술·조각작품을 모티프로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는 아름답다」 등의 작품을 발표했던 김씨는 『이번 여행에서는 오르세이, 루브르 같은 대형 미술관들이 아니라 유럽 각지의 개인미술관들을 둘러볼 작정』이라고 말했다. 니스의 피카소, 오슬로의 뭉크, 바르셀로나의 미로, 프랑스 알비의 로트렉 등 주로 19세기 후반 이후 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12작가의 소형미술관들이 목표. 젊은 세대답게 영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대하다. 당장 그는 이번 주부터 설악산에 들어가 자신의 작품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 모티프를 얻어 제작되는 영화 「얼음」의 최종 시나리오작업을 할 계획. 이 부분에서 이윤기씨는 『영화는 본래 문학의 자식인데 요즘은 영상에 문학이 증발되고 있는 것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길만 걸어도 어깨를 부딪치는 우리 「살비빔의 문화」를 잠시 벗어나 「유목민의 문화」를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곧 여행길』이라며 「여행에 순교하는 자세」에 한 목소리를 내면서 오랜만의 선후배 만남을 이어갔다.

작가들, 길 위에서의 삶

「세월」 「담배 피우는 여자」의 작가 김형경씨는 19일 2년여의 유럽여행길에 나섰다. 김씨는 『전업작가 생활이 5년이 지나자 너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어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번 여행길은 문단의 화제가 됐다. 살던 전세집까지 빼서 그 돈을 들고 떠나는 길이다. 구체적 여행계획도 단지 맨 먼저 로마에 들어가 두어 달 머문다는 것 외에는 세워놓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방랑인 셈이다. 무엇을 보고 여행기 형식으로 그걸 쓰겠다는 생각도 일단 털어버렸다. 그냥 길 위에서의 삶을 보내고 돌아오겠다는 말이다.

최근 창작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까지 숨돌릴 틈 없이 작품을 쏟아냈던 은희경씨는 12일 3개월간의 미국여행길을 떠났다. 이 작품집을 내고 나서 『당분간 재충전의 기회를 가지겠다』고 한 말을 실행에 옮긴 것.

조금 다른 경우지만 지난해 「그 집 앞」으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이혜경씨는 2년째 자원봉사자로 인도네시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을 떠나있다. 당초 그가 떠난 것도 『아무런 기득권이 없는 상황에서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연유에서였다. 모국어를 떠난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모험이다. 그러나 이런 모험이 그들의 내면을 거쳐 독자들에게 작품으로 돌아올 때 작가도 독자도 「새로운 삶의 시선」을 갖는 기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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