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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종교]15. 나를 움직인 이 한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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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종교]15. 나를 움직인 이 한구절

입력
1999.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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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가든 마찬가지겠지만 젊은 시절, 나는 작업에 대한 고민으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한국화를 택한 나로서는 그때까지 공부해왔던 동양화를 그대로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미술사조에 눈을 크게 떠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가장 큰 무게로 다가왔다. 또 작업에 대한 확고한 이념을 만들어 놓고 그 이념을 뿌리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몸과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을 맡길 것인가.

예술에는 지역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절대적인 미(美)의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나를 맑고 깨끗하게 정제하여 수도사 같은 자세로 그 정수(精髓)만을 뽑아내는 작업을 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감정이 몰고가는 대로 나를 내던질 것인가.

이러한 고민에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던 내 눈에 글귀 하나가 들어왔다. 『나의 작업에 변모만 있을 뿐 발전이란 없다』 피카소의 말이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림이란 추구하면 할수록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피카소는 갈 때까지 가보았다는 뜻일까. 대단한 자신감, 자칫하면 오만할 정도의 발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은 회화에서 조각으로, 다시 조각에서 판화로, 도자기로, 또 거대한 정신의 에너지로 바꾸어질 수 있는 어떤 재료로도 자기를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혹은 추상, 인상주의로 표현주의로도, 혹은 고전주의나 낭만주의로도, 천(千)의 얼굴로 표현할 수 있는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또 곰곰이 생각해보면 겸손의 말이기도 한데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한계를 표현한 말이기도 하기에 고개 숙여지는 말이기도 하다. 즉 경지에 이르면 표현된 형식만 다른 것이지 그 내용은 같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많은 고민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경지는 엄청나게 많은 조형적 체험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표현 수단과 많은 표현양식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내딴에는 꽤나 노력해왔다고 자부하지만 피카소의 그 경지가 내게는 요원한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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