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시내에서 충주 쪽으로 빠지는 국도를 따라 차를 타고 가면 연세대 원주캠퍼스가 나오고 조금 더 가다 왼쪽의 시골길로 들어서서 3, 4분 지나면 산밑쪽으로 회색 건물이 나타난다.4층짜리 건물은 정면에서는 단촐하나 다가가 보면 뒤편에 같은 크기의 집채가 또 하나 포개져 있고 두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중간의 공지는 잔디밭 뜰이다. 맨 위층의 휴게실에서는 들녘 건너로 나지막한 연봉들의 전망이 좋다. 이것이 지난 6월 9일 개관한 「토지 문화관」이다.
토지문화관은 앞으로 작가들의 작업실과 숙소로 쓰일뿐 아니라 각종 세미나, 국제회의, 공연등 문화 전반에 걸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문이 열려있게 된다.
우리나라에 이런 통합문화시설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토지문화관을 크게 떠들 일이 아니다. 이 문화관이 자랑스러운 것은 이유가 달리 있다.
토지문화관은 우리 현대문학사를 빛낸 박경리씨의 대작 「토지」를 기념해 세운 것이다. 한 작가의 생가나 작품 산실을 기념관으로 보존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한 작가를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딴 건축물을 건립하는 일은 또 간혹 있어도 한 작품을 기념하는 문화시설을, 그것도 작가의 생전에 만든 것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파리 근교의 마를리 르 르와에 있는 「몽테크리스토관(館)」은 뒤마 페르가 「몽테크리스토백작」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지은 성관(城館)에 작품명을 따서 옥호를 붙인 것이며 지금 작가의 기념관일 뿐 다른 용도로 활용되는 것도 아니다. 「토지」는 세계문학사상 자기 가람(伽藍)을 가진 유일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토지문화관은 또 한국토지공사가 40여억원의 비용을 전액 부담하여 세운 것이다. 문화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정부산하 공공기관이 문화지원에 나선 것은 신기할 정도로 기특한 일이다.
더구나 「토지」의 산실인 작가의 집을 택지 개발을 위해 철거하려던 토공의 「반문화」정신이 그 집을 작가의 기념관으로 꾸며 보존하면서 따로 문화관까지 건립하게 된 대역전극은 문화인식 전환의 본보기로 감격적이다. 토지문화관은 이 문화인식의 기념물이기도 하다.
이런 토지문화관의 이례성(異例性)에다 이번 개관식에 김대중대통령이 참석한 것 또한 유례가 드문 일이다. 현직 대통령이 공적이 아닌 문화행사에 나타난 것은 우리나라로서는 뜻밖이다. 작품 「토지」에 대한 김대통령의 개인적인 감동이 크게 작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것은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었다.
우리의 문화 인식수준을 한격단 높인 토지문화관의 개관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문화의식 수준에 실망하게 된다. 이날 개관식에 관한 우리 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이 수준이 금방 드러난다.
도하 신문중에서는 이 개관식을 한줄도 보도하지 않은 것이 서너개나 된다. 두어 신문은 대통령이 참석한 사진 한장만 게재했다.
대통령의 연설내용까지 실은 것은 두어 신문밖에 없다. 한 TV방송은 이날 저녁 종합뉴스시간에 자사 연속극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이 유행이라는 보도까지 하면서도 이 행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이날 행사의 압권은 대통령의 연설이었다.
『저는 「토지」 주인공 용이의 애인인 월선이가 용이의 무릎위에서 숨을 거둘 때의 장면에서 그 아름다운 사랑에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용이가 월선이에게 “너 여한이 없제?”라고 물었더니 월선이의 대답이 “야 없입니다”라는 대목에서 한국사람의 한(恨)의 본질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토지」는 격동하는 근대사의 풍랑속에서도 민족혼을 잃지 않고 지금의 삶의 토대를 일구어온 우리 민족의 대장정,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연설문은 우리나라 대통령 치사의 한 모범으로 남을 것이다. 어떤 정치적 연설보다도 더 웅변적이다. 이 속에는 어떤 문화정책을 천명하는 것 이상으로 강한 대통령의 문화마인드가 들어있다. 이런 대통령의 문화의지가 평소 역대 대통령의 문화의지를 지탄해 온 언론에 의해 묵살당하다시피한 것이다.
토지문화관의 개관식에서 박경리씨는 인사말을 통해 『우리 문화에는 문화의 본질은 없고 문화라는 말만 넘쳐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문화 자체보다는 문화라는 말이 앞서는 우리사회에서, 토지문화관의 개관은 물론 대통령의 참석 또한 모처럼 우리 문화의 한 실체를 보여주는 마당인데, 막상 문화라는 말만 떠들던 목소리들은 이 실체를 보고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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